나의 이야기

비오는 주일 마니산에서..

두부장수종치네 2011. 11. 7. 19:08

 

비가오는 주일..
평소에 저질 체력임을 인지하고 있는터라 어떡하든 체력 비축을 위해서라도
산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데 친구들 꼬임에 강화 마니산에를 다녀왔다.


산은 내게있어 편하게 마음을 쉴만한 장소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산에를 가면 모든 고뇌도 번민도 다 날려버린다하는데 나에게있어 산에서
참모습을 찾는다는건 괜히 겉모습 폼나게 만드는것과 하등 다를바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 체력에 비해 산을 잘 타지 못한다.
숨이 턱에 차 헥헥거리면서도 오기가 발동해 산을 타는 것이 싫기에 산을 별로라 한다.
솔직히 성정이 급한 탓도 있어서 더욱 그럴지 모르겠다.
쉽게 지치기도하지만 이상 체질인지 몰라도 회복도 빠르다는게 복이라면 복일 수 있겠다.
내 페이스만 잘 유지한다면 보통 사람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산을 잘탈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을 늘 하지만 결과는 늘 생각과 다르게 나온다... 쑤벌~~

 


나를 아는 블러그 친구들도 있지만 체구가 그리 크지않은터라 다른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아
보행을 하면 체력손실이 많을 수 밖에 없어 산을 잘타는 사람과 산행을 하면, 나는 그순간부터
일행과 나는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으로 독립시킨다. 일종의 " 섬 "이 되는셈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산을 타면 나는 언제나 " 혼자 "인셈이다.
일행이 있으면서도 " 혼자 "라는 것, 산행에서 "혼자"라는 것은 내게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 아닐수 없다. 산이 지니는 묵묵함과 포용력과 변함없는 산의
기세와 정기를 나는 온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수없이 너덜거리는 내 삶에서 반드시
만나게되는 고난의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빨리 지나야 할 곳과 느리게 지나야 할 곳이 산에 있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길이
산에 있다, 완만한 비탈과 급한 비탈이 번갈아 있고, 평탄한 길과 험한 길이 수없이 반복된다,
산은 삶을 배울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곳이 아닌가 싶다,

 


산 전문가들이 이야기 하듯이 산에서는 겸허해야 한다는데..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욕망은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한다,
함허동천을 끼고 마니산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 생각보다는 가파르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평상심을 잃어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치기어린 마음이 지배하였던 것이 아닐까?


내가 일행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나도 너희들 못지않게 수준급 등산가라는것을?
아니면 용기로 포장된 사내다움이라는 강박관념?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욕망에 휘둘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빨리오라는 채근에 결국
혼미.. 무아의 상태를 접해야만 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않았다. 소리조차도 들리지않는
그 먹먹함.. 깊은 어둠과 습기찬 바닥만이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일행들의 웃음소리.. 비단감은 구렁이같은 비웃음의 소리였을까?
하늘의 음악같은 소리였을까?  갑자기 송익필 시선의 산행이라는 시조가 생각났을까?


산길을 가노라 쉬는 걸 잊고, 쉬노라니 가는걸 잊네.

......... 잘 기억이 안나고.............

내 뒷사람 몇이나 앞질러 갔나.
저마다 그 머물곳으로 돌아가려니 또 어찌 다툴일이랴..
(대충 이런 시조였던 것 같다/ 내가 백과사전이 아니여서 기억부재일 수도...)


남보다 돋보이려는 데서, 남보다 앞서려는데서 불행은 시작되는게 아닌가싶다.
남보다 앞서간다고 꿈꾸는삶의 끝점에 반드시 이르는 것도 아니요.
남보다 늦게 간다고 길의 꼭짓점에 도달하지 못할 일도 아닌것을 미처 깨닭지 못한것이다.
욕망이란 강하면 강할 수록, 넘치면 넘칠수록 그 끝은 더욱 보이지 않는게 아닌가싶다.

 


함허동천을 타고 산길을 굽이돌다 보니 만나는 절집...정수사..
내가 한때 불교미술에 미쳐 탱화구경에 도끼자루 썪는줄 몰랐던 시절.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기도도량..정수사..


비가온후라 산아래서 안개피어 오르듯 운무를 뿌리고 오묘한 자연과 어우러진 사찰.
온 마음이 청정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산행에서 나의 무지함때문에 생겼던 그 어지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오만한 자의 만용을 깊게 다시금 깨우쳐 준 도량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