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빗장을 풀자...
다음주면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온다.
남자든 여자든 누가 먼저 초콜릿을 주는 것이 무슨 상관 있을까마는,
세간의 습속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발렌타인데이가 오기도전에 나는 쵸코렛 선물을 받고
이 나이에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기분 좋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일반 쵸코렛도 아닌 고디바 쵸코렛..
내가 키세스 쵸코렛 광고 담당이였던 탓에 엄청나게 많은 쵸코렛을 먹어봤는데
게중에 고급스럽고 제일 맛있는 쵸코렛을 뽑으라면 세계 3대 명품 쵸코렛중에 하나인 고디바 쵸코렛이다.
벨기에에서는 일종의 국가 산업으로 발전시킨 핸드메이드 쵸코렛이기도 하다.
초콜릿이라는 언어가 주는 묘한 마력....
말이 지닌 울림은 참으로 오묘하여, 초콜릿이라는, 실제 발음과는 달리,
'콜'과 '릿' 사이의 발음이 '초'와 '콜'의 사이보다 얼마간은 길어서 급하다가 느려지는 리듬을 만든다.
마지막 'ㅅ'은 급하게 끝나는 발음으로, 느릿하던 삶이 느닷없는 장애물을 만난 형국으로
긴장감도 가지고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초콜릿이라는 말이 나름대로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언어 같기도하다. 생각을해보니... 사랑을 고백한다는 이 쵸코렛....
나는 오늘 받은 이 쵸코렛으로 사랑을 고백받은 것일까? 기분좋은 상상...
나는 존재하면서도 부재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내 마음안에 존재했던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간이 아니였을까 생각이든다.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적은 없으나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린적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래도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존재한다는 증거 아닐까?
가슴속 가득히 몰아치는 그리움의 열정이란, 지녀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것이다.
어떤틀을 만들어 정형화시킬수 없는 무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 아마 그리움 일 것이다.
그 그리움은 희망을 이야기 할 것이고 그리움속에 묻어나는 외로움은 무한의 만남을 위한
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살아남게 한 것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을 이야기 하자니 이나이에도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보통의 연정담(戀情譚)이 지니는
욕망의 삼각 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야기안에 끼어드는 장애물이란 늘상 그렇듯이 형상(形象)을 지닌 장애물이 아니라
형상이 없는 장애물이라, 사랑이 지니는 절대성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인식 그대로 현실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오혜성이라는 인물이 생각이 난다.
엄지라는 주인공에게 '난 네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말하던 까치 오혜성.
아마도 내가 바라는 사랑이란.. 영화같은 아니 만화같은 그런 추억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라고
염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든다. 그 염원이 아마 하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이념이 아닐까싶다.
이념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틀림없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이념이라면 그 사랑을 이길 수 있는 이념은 없을 것이다.
캐피탈리즘(capitalism)이든 코뮤니즘(communism)이든, 민주[democratism]라는 이름으로
깃발을 날리는 수많은 이즘들도, 사랑이 이념이라면 그 빛이 바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절대적인 사랑은 지독한 이념일 터이다.
어쩌면 그것은 집착이 빚어내는 병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집착이 상대를 파괴시킨다면 그것은 지독한 병이겠지만,
사랑이라는 순수의 참 결정체라면 한 번쯤 그런 사랑을 지녀보는 것도 멋진 삶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내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집착일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격정은 놀라울 만큼 많이 가라앉았음에 사실 놀라기도한다.
젊은 날의 격정이 지나고 세월이 흐른 뒤 얻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격정을 이기는 심안일 것이다.
그 심안이 주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심안일것이다.
가끔은 집착과 욕망의 더미에 눌려서 몸부림치기도 하지만, 새 아침이면 다시 평온해지곤 한다.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가는 가라앉기를 거듭하면서, 집착도 욕망도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
견고하고 진실한 삶의 알맹이만 남겨져 있는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노회한 삶의 격정 덩어리 속에 숨겨진 허허로움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의 오십 년을 넘는 삶은 무엇으로 보상되어야 할까. 허망한 것은 아닐까?
요즘 내가 걱정하는것 중 하나는 나이가 주는 부정적시각에 침몰하지 않았으면 하는것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우리 사회는 다른 영역들에서는 애매한 경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관한 한 분명한 빛깔을 선호한다. 어쩌면 나는 분명한 빛깔을 요구하는 사이에
놓여 있을수 있겠다. 내가 지닌 지금의 느낌은 분홍빛일까 파란빛일까?
조만간 블러그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