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light (Beethoven) - 베토벤의 ‘월광 쏘나타"
The City of Prague Philharmonic Orchestra 
 
 
 

베토밴의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제 14번은 흔히

( 월광 ) 이라고 불려지는데, 이 곡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곡도 드물죠.

 베토벤이 눈 먼 처녀를 위해 달빛에 잠긴 채로 만들었다던가,

 빈 교외에 있는 어떤 귀족의 저택에서 달빛에 감동되어 만들었다던가,

 또는 연인에 대한 이별의 편지로 작곡한 곡이라든가 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스위스의 루체른 호반


그러나 베토벤 본인은 단지 '환상곡 풍의 소나타'라고 불렀을 뿐,

월광이란 이름은 베토벤이 죽은후 비평가 렐슈타프가 이 작품의 제1악장이

스위스의 루체른 호반에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다고 비유 한데서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줄리에타

1801년에 완성이 된 이 곡은  진실한 첫사랑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바쳐졌는데 그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운 제자였는데,

두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염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베토벤의 '영원한 여인'( 불멸의 연인) 의 정체가 이 여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만

줄리에타는 이 곡이 완성될 때쯤 젊은 멋쟁이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돈도 없고 신분도 낮고 더욱이 귀까지 나쁜 음악가와는결국 헤어지고야 만 것이죠.

줄리에타가 이런 명곡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는 여성이었다는사실을 깨달은 베토벤은

크게 실망했고 마침내 그 유명한 '하일 리겐시타트 유서'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쥴리에타를 잊지 못하여 상아로 만들어진
쥴리에타의 상을 일생동안 자신의 책상 위에 두고 있었으며,
 1823년의 대화록에는 쉰들러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보다 나를 훨씬 더 사랑하였다.
그러나 나보다는 그가 그녀의 연인이었다.”
 
 
 
 
 
조세핀
 
 
두 번째는  죠세핀 브룬스빅(1779-1821)과의 관계였다.
 
 죠세핀은 아주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보다 30살이나 더 많은 죠세프 다임 백작과 결혼하였는데
1804년도에 남편을 잃게 되었다.
 
 그 후 1804년-1806년 사이에 베토벤이 사랑에 빠졌던 듯하다.
죠세핀의 여동생이었던 샤롯은 베토벤의 방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토벤은 거의 매일 방문하며 수 시간씩 죠세핀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다소 위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도 베토벤이 성적으로 아주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추정은 죠세핀의 편지에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1805년 죠세핀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은
 만약 당신이 지나치게 나에 대하여 육감적으로 대하지만 않았더라면
내 일생에서 가장 깊은 추억을 남길만한 것이었습니다."
 죠세핀에 대한 사랑은 1807년 여름 경에 식어버린 듯하다.
 
이 당시 한 편지에서 베토벤은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과 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세핀 의 딸이 9개월 됬을떼  베토벤은 "영원한여인" 의연서를 쓴다
빼토밴을 닮은데다가 음악의 신동이였다
이아이가 베토밴의 혈육이였는지, 마지막사랑의 소산이였는지 알수없다
 
  
 
 
 
 
  네 번째는 안나 마리 에르되디 백작부인(1779-1837)과의 관계이다.
 
 안나는 베토벤의 열렬한 애호가로서 피아니스트였다.
1796년 항가리 백작과 결혼 한 후에 크로이티아에 정착하였는데
1820년 이후에 오스트리아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1808-1809년 가을과 겨울동안 베토벤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방을 얻어 살았으며,
베토벤은 그녀를 ‘고백신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807-1817년 사이 약 10년간에 걸쳐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베토벤의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베토벤이 사귀었던 여인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여인으로 기술되었던 여인이다.
 
베토벤과 관련된 편지나 일기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자신의 아들의 살인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있던 여인이었다.
피아노 3중주곡 <유령(Op 70-1)>, 첼로 소나타 제1, 2번이 헌정되었다.
 
 
 
다섯 번째는 베티나 브렌타노(1785-1859)와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여류 시인으로 괴테와 베토벤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여 표현하며 때로는 거짓말을 일삼는 여인이었다.
 베토벤이 일시적으로 매력을 느낀 적은 있으나 죠세핀에게 느꼈던
 그런 깊이 있는 감정은 아니었던 듯하다.
 
 
 
 
 
 
안토니 부렌타노
 
 
 여섯 번째는 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와의 관계이다.
안토니는 18세때에 프랑크프루트의 상인이었던
프란츠 브렌타노와 결혼하여 4자녀를 두게 되었다.
 
 프란츠는 아주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나 안토니는 고향 비엔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으며 게다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슬픔은 더 깊어지게 되었다.
 
안토니는 자신의 시누였던 베티나 브렌타노의 소개로 베토벤과 알게 되었는데,
이 당시 안토니는 베토벤에게 청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베토벤은 크게 당황하고 또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듯하다.
 왜냐하면 안토니는 이미 결혼을 하여 4자녀를 둔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베토벤은 안토니의 남편 프란츠와도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12년에 쓰여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에게”의 제목으로 쓰여진
3통의 편지의 주인공이 안토니 브렌타노라고 주장하는 전기작가의 말대로 설득력이 있게된다
 
이 편지들은 베토벤이 프라하에서 테플리츠로 여행하던 중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수주일 후에 베토벤은 안토니와 남편 프란츠 브렌타노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 때에 이 삼자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안토니와 프란츠는 부부였으며 베토벤은 친구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안토니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베토벤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후 5년 뒤에 베토벤은
안토니의 딸 멕시밀리안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베토벤의 안토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고 있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신이시여! 나의 덕을 강화시켜주며,
내가 진정으로 떳떳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도록 해 주소서.“
 
1816년도 작곡된 “멀리있는 애인에게”라는
연가곡을 작곡하게 된 것도 안토니와 관계가 있는 듯하고
1820년대 베토벤의 헌정을 받은 여인은 안토니와 딸 멕시밀리안 밖에 없다.
 
피아노 소나타 제30번(작품번호 109번)은 맥시밀리안 브렌타노에게 헌정되었으며
 
 

베토벤 피아노 쏘나타 제30번  op 109

 
피아노 소나타 제32번(작품번호 111)의 영문판과
디아벨리 왈츠를 주제로 하는 33개의
변주곡(작품번호 120)은 안토니에게 헌정되었다.
 

누어만 있을정도로 병약하였던 안토니의  방앞에서 
 피아노를 손수치며 매일  음악을 들려주었다하니
그의 안토니오에대한 연정은 
당시 뭇 여인들에 선망의 대상이였다고 한다
 
 
 
  일곱 번째로는 테레제 말파티(1792-1851)와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비엔나 의학협회를 창립한 요한 말파티의 조카로서
요한 말파티는 베토벤 임종 당시 자리를 지켰던 사람 중이 하나이다.
 테레제 말파티와 동생 안나 말파티는
그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매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베토벤은 18세된 테레제에게 매료되어 결혼까지 고려하였던 듯하다.
친구 베겔러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출생 신고서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으며
또 그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하던 양복점에서 옷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말파티의 가족은 베토벤의 이러한 태도에 극도로 화를 내었으며
말파티는 베토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여덟 번째로는 도로티아 폰 에르트만(1781-1849)과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1798년 오스트리아 군인과 결혼하여 5년 후부터
 베토벤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던 여인이다.
나중에 그녀는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가장 저명한 해설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15-1816년 사이에 피아노 소나타 제28번이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8번 

 Wilhelm Backhaus, Piano  

Ludwigethoven (1770-  

 에르트만은 그녀의 생의 말기에 가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베토벤은 거의 매일 우리집을 찾았다.
 때때로 그는 입맛이 전혀 없다고 불평하였다.
또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고 전혀 식사를 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신경이 아주 예민하였으며 기분이 수시로 변하고
 때로는 친구들에 대하여 괜히 비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가 점점 더 멀어지는 이 가련한 음악가에 대하여 누가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며 모든 것을 용서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나는 베토벤과 순수한 우정을 유지하였다.
” 도로티아와 베토벤과의 관계는 순수한 우정관계였던 듯하다.
 
 전기작가였던 마렉은 1812년 베토벤이 쓴 “불멸의 연인에게”의
 한 대상으로 이 여인을 주목하기도 하다.
 베토벤이 사망하기 12일 전에 베토벤을 방문하였던
페르디난드 힐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함께 방문하였던 훔멜과 대화를 하면서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요.
 당신을 돌보아 줄 부인이 있으니 말이요.
 나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요.
 당신 부인을 한번 만나게 해주시오’. 라는 청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깊이 후회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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