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주일 중에 나름 제일 기다려지는 날이 수요일입니다.
왜 수요일날이 기다려지냐구요?
이쁜 여자들을 많이 볼수 있음으로해서  세상에 태어남을  감사하게 느끼는
날이기도 하고 또한 이날은 공짜로 짜장면을 먹는 날이기도 해서.... 꿀꺽!!


사실은 제 멘토역활을 하시는 선배 한분이 계시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시고
온누리 교회 장로님으로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회사 쥔장이신 선배가
열린 예배를 통해 직장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직장인들을 위한 예배라고 할 수가 있지요.
역삼동 차병원 근처에 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은 수요일이되면 스스럼없이 이 회사 일층에
마련된 재단을 찾아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당근  음식입니다.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짜장면..짬뽕.. 철가방 대기조들이 들이닥쳐 음식을 내어놓고 갑니다.


어디가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저로서는 날라리 교인이고 아마도 이날 먹는
짜장면이 그리워 예배에 참석하는 불량 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소실적 대학 전공이
신학을 한터라 제 멘토께서 특별히 많이 아껴주는 사람중에 한 사람으로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걸 사명처럼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나도 천국에 가고싶다는 응근한 욕망과 젊은 처자들이 유난히도 많이 오는 그 예배에 가면
세상의 精氣를 다 흡수하는 듯 싶기도하고  눈 호사를 아주 심하게 하는터라 침 꼴깍 삼키는
재미로 하늘 계단문을 들어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단히 죄송하고 한없이 부끄러운 죄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평소에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시간을 내어 기도를 드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시간이죠. 기도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하지말고 보이지않는 곳에서 기도를 하라
예수께서 말씀 하셨지만 저같은 날라리 신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딴 짓하기 마련이니

기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시간을 만들어 준 걸 감사히 생각하고 열심히 합니다.

 

제가 타인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타인을 하나의 객체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아마도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타인을 인정하지 않기에 폭력과 더 나아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결국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망은 인류에게 막을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내가 알게 모르게 타인들을 인정 하지 않음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나와 다른 영역에 거처한다는
이유로.. 남을 필요 이상 높게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요.


세상을 어느 정도 살다보니 깨닭게 되는 것이 있더군요.
물론 저보다 더 똑똑하고 깨우침이 빠른 분들은 뒤늦게 그걸 깨우친 제게 비웃을지 모르겠지만요,
나라는 개념은 남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이뤄진다는 걸 .. 남이 없으면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늦게 깨닭지 않았나 싶습니다.


집단 속에서 여러 남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지위나 역활을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늘 나라는 독립된 존재만을 위해 살아왔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나이며 동시에 남인지도 모르는데 나라는 존재만 생각하다보니 그 고유성에
집착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며 신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가치와 신성함이 폄하되거나 훼손되어선  안되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세상속에서만 소통하려던 내가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기쁠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가치있는  지인분 들에게 조금이나마 복 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 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지금껏 세상속에 묻혀 살던 내게 단절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어 중보기도는 기쁜일이 아닌가싶습니다.


내가 기도했던 그 시간이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빚어낼 수 있다면 현재 내게 결핍된
욕망으로부터 조금은 자유스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이란 늘 채워도 늘 부족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불완전한 그림자 일뿐 완전한

외형에대한 집착은 허상에 기댄 편견이며 독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블러그 친구분들 개개인 적으로 다알지 못해 기도를 드리지 못했지만...
제게 개인적인 고민을 말씀해주셨던 몇몇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작은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어 그분들이 소원하고 힘든 것들을 다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날라리 신자가 외쳐되는 헛된 기도일지 몰라도 그 안에 뜻이 하나님의 역사안에
들어있는 것이라면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지신 블러그 친구분이 이 글을 보시면 공감하시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힘든 하루도 다 지나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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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을 믿든,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 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학자 마렛은 인간을 일컬어  이성적 인간(homo sapiens)이라 하기보다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us)이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 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게 종교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특정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드는 종교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 일 뿐  종교 없이 살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도 나름대로 무신론 이라는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 조차도 종교적 일 것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그야말로 치유 할 수 없이 종교적인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삶과 우주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일종의 믿음의 체계를 갖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이처럼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특히 한국사람의 경우는 그것이 더욱 두들어 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전통 종교를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도 많고, 이를 종교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이쪽 저쪽 마음에 차지 않으면

더욱 뜨거운 종교를 만들어 받들기도 하고 그것도 싫은 사람은 부나 권력 같은 세속적 가치를 지고신 (至高神)으로  받드는 세속 종교에

선명을 바치기도 합니다.한국 사람은 이래저래 극히 종교적인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종교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다면,

새로 물어야 할  긴급한 문제는 어떤 종교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한 가?    내가 따르는 종교는 내게 바른 종교인가?

요즘 같은 시대에 믿음이라는 것이  하물숭배에 목줄을 건 섬사람들의 믿음과 비슷해도 좋은 것인가? 하는 등의 질문일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그러면 어떤 종교를 갖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위해 종교를 크게 둘로 구분해 봐야 할 것 입니다.

하나는 닫힌 종교 요.. 다른 하나는 열린 종교 입니다. 닫힌 종교의 특징은 스스로 정한 절대적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겁니다.

 

모든 해답, 모든 행동 강령은 이미 다 주어진 절대 불변의 것이므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고 덮어놓고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거기에 따라 복이나 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화나 벌이 내린다는 공식을 가리킵니다.

 

열린 종교란 이와는 달리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상의 세계를 절대화 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이런 세계를 초월하는

실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지금 가진 생각이나 안목이 어쩔 수없이 제약되고 불완전한 것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리의 더 깊고 넓은 면 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깨쳐 나가도록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가 닫힌 종교이고 어느 종교가 열린 종교인가? 이것은 닫힌 종교요...저것은 열린 종교라는 식으로

수직적 전통에 따라 대부분의 종교는 닫힌 종교일 수도 있고 열린 종교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종교안에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가 동시에 공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이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 종교의 참뜻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적 문자에 매달린 채 언제까지나 질식할 것 같은 종교 생활만을 계속하게 된다면

그 종교는 그대로 닫힌 종교가 되는 것 이고 종교의 참뜻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종교가 본래 의도했던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삶을 살도록 한다면 열린 종교가 되는 것 입니다.

 

제가 이런 코너를 만든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화나 포교를 위해 이 코너를 만든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이야기를 합니다, 종교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아라. . ..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런데 무분별한 종교의식과 반목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런 코너를 만들어 서로가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새로운 場 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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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으뜸은 행복이다. 

무릇 성공한 자가 되기보다는 행복한 자가 되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소망은 이뤄질수 있을것인지 잘 모르겠다. 

행복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러나 모든 가치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한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줄 모른다면 타인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도 행복할까, 행복이 성공의 최정상에 서 있다면 거지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너희들이야......

내 자신이 예수쟁이라서 이러한 성경구절이 떠오르는걸까?,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너무도 담대한 예수의 단언이기 때문이다. 

창고에 곡식을 잔뜩 쌓아놓지도 않았던 예수가 어찌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단 말인가,

 

물질은 육체다. 

모든 물질은 육체의 안락으로 이어지며,

그 선을 넘는 물질은 욕망의 테두리에서 비만의 몸짓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러므로 육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모든 물질은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좀 오래전에 집안에 유산을 놓고 다투던 친척들이 있었다.

그때 유산을 놓고 가족끼리 설전을 벌리던 그 추악함.

타인이 아닌 가족들끼리 죽은자를 앞에두고 마치 죽일듯이 폭언과 망언을 퍼붓는

그들의 모습에서 난 악마를 보았다. 그렇게 물질이 좋은것일까?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저금통장과 다문 입.

캄캄한 부엌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의 신속함으로 그토록 많은 돈을 모았건만,

풀어진 손은 어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며,  총명함으로 필명을 날리던 사람은

어찌 늙어서 망령된 소리만 하다가 입을 다무는 것인가? 

 

안타까움으로 평생을 지탱하던 집념의 결과가 혼이 쑥 빠져나간 고깃덩어리로

끝을 맺으니, 욕심 없이 보는 옆 사람의 마음마저도 심란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웃음이라도 더 터뜨리고,

한 번의 손길이라도 옆으로 뻗어 다정함을 내밀어 보자.

모든 것은 살아생전에 다 이루어질 일이다.  

 

오늘 참았다가 내일 웃겠다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오늘 주지 않고 내일을 기약하는 사랑은 믿을 수 없다. 

현명한 인생장사꾼은 항상 현찰거래만 한다. 

웃음과 사랑에는 외상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단호한 계산이었는 모른다.

 

한 끼니의 밥그릇에 웃는 여자를 얻은 남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지금 노동판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도 세 끼니의 밥그릇은

마련할 돈을 벌 수 있다. 한 끼니로 배를 부르게 만들고 나머지 두 끼니로

잉여행복을 늘어놓는다.  그 앞에서 여자는 환하게 웃는다.  그것이 행복이다. 

돈로 환산해도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는다.

  

내가 예수쟁이라서 또 예수의 말을 해야겠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은 물질이 아닌데,

어찌하여 물질을 표상하는 가난이란 용어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갖다 붙이는가, 

도대체 무엇이 마음이고 무엇이 가난하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대가인 석가모니의 팔만대장경을 떠올려야만 한다. 

 

마음이란......

 

문자에 묻힌 불교에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서 명경지수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피안의 깨달음을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아로서 절에 흘러들어 장작을 패고 잔일이나 하던 머슴은 문맹의 눈으로

마음을 말했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도다......  

유명한 조계종의 한 법사가 쓴 선문답집에 나와있는 구절이다.

 

항상 마음이 화두의 출발점이고, 끝이아닐까 생각해본다.

수없는 색으로 세상을 투영하여, 아메바처럼 수만 가지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꾸는 가슴속의 괴물,  그 괴물이 욕망의 근원지일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계하여 갈고 닦으며,

기어이 그 형체마저도 사라지게 해야 할 대상이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 어린아이의 번잡스런 손발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옛 성인은 마음을 달래고 도닥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며,

행여 오감으로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보고, 듣고, 먹고, 입고, 냄새조차 맡는 일을 가려서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대문명은 진리를 바꾸어 놓은듯 싶다. 

욕망이란 수레바퀴를 돌려야 하는게 아닐까? 

그것만이 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는 길이며, 행복을 향하는 지름길이 될것이다. 

내가 바라는 행복한 자가 되려면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행복을 쟁취 하여만 할 것 이다. 

입 벌리지 않는 새끼에게 어미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격언은 괜히 만들어진

말이 아닐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밀레니엄시대에 길을 잃었다. 

어쩌면 그렇게 성현의 말과 반대되는 욕망의 현실이 더욱 우월하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태어나면서 자신의 그릇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명심보감은 설파했다. 

자신의 분에 넘치는 행동이나 욕심은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욕망의 시대에 반기를 들어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욕망은 욕망을 낳는다.  욕망의 고개를 넘어서니 더 높은 욕망의 고개가 보인다. 

그래서 욕망의 귀신에 홀린 눈으로 욕망을 추구하며 욕망을 실현하려고 욕망을 부린다. 

그것이 현대문명이 나에게 가르쳐준 인생지도가 아니였나 생각을 해본다. 

 

나는 가끔 지친 내모습을 보면서 당황해 한다.

노숙자가 밤새마신 소주병 굴러다니는 공원에 들어서서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그 노숙자들은 저 하늘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산다는게 무엇인지? 정말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사랑하는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져야 하는건지- 이런걸 생각했을까?

 

하루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들 .

어느시간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인듯 행동하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남자처럼 어깨 축늘어져 말하기도 싫다가..

마치 조을증 걸린 여자처럼 수십번의 감정변화들..

 

그러다보니 글을 쓸때 내 감정의변화에 따라 가끔은 정말 죽을것같은 느낌의

글때문에 친구들이 위로하고 다독이느라 난 늘 외롭고 축축한 놈이 되어버렸다.

사실 난 그들이 남긴 댓글을 보면서 나의감정 스페이스를 조절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조그만 것으로 큰 것을 헤아리면 끝이 없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으로 영원의 생명을 탐하면 위태롭지 않을까? 

종점을 알 수 없는 욕망의 정거장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창가에 스치는 주마등을 바라보는 내 콧등에 노안의 안경이 걸쳐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다는 말인가,

 

 

기회는 많았었는데... 

웃을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었던 기회, 친구를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기회,

남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할 수 있었던 기회..

욕망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만 않았으면 그토록 많은 기회가 다 살아남았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어리석은가,청아한 소리를 내는 퉁소를 도끼로 사용하려는 우를 범하다니,

 

도끼가 퉁소자리를 넘보고, 퉁소가 도끼를 몰아내려는 으르렁거림은

아름답게 지내도 모자랄 세월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웃기에도 모자라는 세월, 사랑만 하기에도 짧기만 한 세월. 이렇게 나는 가난하게만 살았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행복을 놓치고 말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복은 행복일 것이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다고 했으니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현대문명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으로 그 마음을 버릴수 있도록 나는 다시 한번 다짐을 해 본다.

 

한 가지 결론을 내려야겠다. 

거지도 행복할 수 있다.  거지도 성공의 정상에 우뚝 설 수가 있다. 

그것이 현자의 인생이다.  즐기라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푸드득~

먹이를 쪼던 비둘기가 내 무릎위로 뛰어 오른다.

 

Mizs,net  올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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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교회를 다녀왔다.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다녀온 교회.. 내게 있어서 신앙심이란 무엇일까?
술자리, 혹은 어느 모임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해 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일년에 세번 교회를 가는
정말 제도권내의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사이비 교인이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무슨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텍스트가 주는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의 의무라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기독교인 이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거다 저거다를 택할 수 없는 모태신앙,
그 모태 신앙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린 시절 종교적 방황이 누구보다 많았던거 같다.
난 그 종교적 방황을 마무리 하기위해 안 믿어 본 종교가 없는 것 같다.
 

중학교 2학년때로 기억이 난다. 한겨울 포장마차 호떡집에서 어느 고등학교 누나가
사준 호떡을 먹고 창신동 허름한 종교 집단에 참여 한 기억도 난다.
지금은 종교의 한 축을 이루었다고 생각이 드나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이 종교가 왜 존재 하는가에 대해 회의에 빠짐 적이 있었다,
남묘호량계교 이발음이 정식으로 맞는지 모르겠다,
 

그 뒤 모슬렘에 빠져 한동안 코란 경전을 옆에 끼고 이태원에를 열심히 다닌 적도 있다,
나의 종교적 행태는 묘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무책임한 종교적 행각은 대학을 들어가 다시 원상 복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원상복귀란 보수적 신학과는 거리가 조금은 먼 하나님 받들기 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나 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 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새끼만 챙기는 내 어머니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적 방황을 마무리 한 후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일 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의 신체변화가 일어나고 곧츄에 털이 한가닥씩 나기 시작해서 제법 북실거릴때도
내 관심은 공부보다는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 같은 학생,
그래도 대학은 들어가야 한다는 어머님의 권고를 받아 드렸고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 없는 날들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보수적인 신학만이 전부였던 그때 내가 배운 건 민중을 위한 신학,
해방신학에 눈을 뜨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ㅅㄴㄷ 교수를
만나기 위해 신촌 연대를 사계절 내내 찾아 다녔더랬다.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 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 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어머니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사회 참여로 잘 알려진 분이었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 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 식 예수 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지금 나는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그 고단한 삶을 행복함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아직도 그 청년에게 미련을
갖게 하나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그래서 기독교인인 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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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늘 혼자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
내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가던 길에
교회에 들러 차가운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순간이지 않았나 생각 된다.
 
성경을 잘 읽지 않은 믿음이지만 신약성서의 아름다운 문장과 멋진 설득력에 늘 감탄하곤 한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홀로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유태인의 유태교가 기독교로 모양을 갖추어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세계화 된 데에는 사도바울의 공력이 있었던 것을 조금씩 깨 달았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작은 공동체적 시오니즘에 끝났을 터이다.
나는 때때로 오늘날 기독교라는 것의 믿음의 방식이
순전히 '사도 바울적 신학'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외국에 나갈 때면 늘 나는 호첼 서랍에 있는 그 나라의 기드온 성경을 줏어(훔쳐)오는 습관이 있다
교회는 내게 풍금을 연주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고,
사도 바울은 내게 헬라 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양분법을 가르쳐 주었다.
 
둘 다 물론 돈은 안된다.
우리가 믿는다 하는 것은_ 사실은 바울의 신학을 믿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공관 복음을 지나고 나니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사도 바울의 십자가 신앙과 부활이 떡 버티고 나를 예수 앞에 굴복시킨다.
만약 바울의 신학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니 하물며 내 작은 신앙에 사도 바울..
그가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도 커서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내 신앙의 제일 우선은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불변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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