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속의 차이와 발견한 진면목

 

책 표지에 실려있는 프로필사진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그녀의 단정하고도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차 한잔의 여유로움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은데 책 표지의 콘트라스트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표정은 동양적인 단정함보다 고전적이고 우수에 찬 이미지, 그 속에서 강한 어떤 신념이 느껴진다.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강인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놀라움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최남숙 권사는 평소에 내가 느낀 단순히 신앙에 열심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글 속에는 따뜻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섬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신앙인으로 사는 삶을 넘어, 젊은 시절 음악 교사로서의 경험과 정서적 안정감이 그녀의 글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음악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규칙적인 멜로디와 비트를 가르는 리듬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해왔다. 그녀의 글은 마치 아름다운 선율처럼 흐르고, 독자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린다. 음악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얻은 그녀는 그 감성을 글 속에 녹여내어, 독자들에게도 같은 안정과 평안을 선사한다.

 

글을 통해 나는 그녀가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을 지닌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단순히 도도하고 강인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는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넘쳤고, 그 마음은 글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은 그녀의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고, 그 신앙은 그녀의 글에 깊이를 더해주었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발견은 나에게 큰 놀라움이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내면의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때로는 아주 크다. 그 차이는 그녀를 더욱 매력적이고 특별하게 만든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단순히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과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최남숙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정서적 깊이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글 속에는 신앙과 음악,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녹아 있다. 이러한 감성적인 글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제 나는 최남숙 권사를 도도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모습은 참으로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지닌 사람인지,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최남숙 작가의 글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아버지와 밥상 - 정성과 사랑이 깃든 일상의 서정적 회상

 

책 제목이 아버지와 밥상.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제목이 주는 중압감 때문인지 처음부터 책장을 넘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밥상은

어쨌다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와 밥상'은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밥상 차림과 아버지의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 피어난 감동과 그리움을 아름답게 담아낸 서정적 산문이다.

이 책은 따뜻한 가정 속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밥상이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완성된 음식들은 가족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아버지와 딸은 그 밥상 앞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어머니의 정성 어린 밥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가족의 사랑과 유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아버지는 딸을 향한 깊은 애정을 밥상에서 자주 표현하곤 했다. 자상한 말투로 안부를 묻던 아버지의 모습은 딸에게 큰 위안과 행복을 주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밥상은 딸에게 있어 사랑의 상징이었고, 그 밥상 위에서 나눈 순간들은 마음 깊이 새겨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아버지께 밥상을 차려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바쁜 일상에서 미처 아버지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했던 순간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아버지가 소천한 후, 그 빈자리가 주는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소소한 일상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랑의 깊이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저자의 회고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모두 일상에서 소중한 사람들과의 순간들을 종종 당연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순간들이 얼마나 귀중했는지 깨닫게 된다. 아버지와의 식사 시간, 함께 나눈 대화, 작은 웃음소리 등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마음 깊이 새겨진 추억으로 남는다.

 

책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깊이를 되새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딸의 삶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며, 그 사랑은 여전히 딸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아버지와 밥상'은 독자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더욱 아끼고, 그 순간들이 주는 감동을 깊이 느끼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깨닫게 되고, 현재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아버지와의 밥상 위 추억들은 시간 속에 묻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마리아베테티니 스타파노 포지가 엮은 길위의 철학은 철학자들의 여행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여행자들이 철학을 정립하고 나름의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삶이 도구이며 수단이였다는 것에 놀랍다.

실제로 새로운 지혜를 얻는 다는 것.
낯선곳에서의 서투름. 불안감 일상적인 삶과는 다른 무섭고 떨리는 여행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에릭호퍼의 길위의 철학자와는 아주 다른 느낌의 책이였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에릭호퍼의 책을 살뻔했다는 자그마한 실수 에피소드도 있다.
한마디로 무식하다는 것이겠지만..


전체적인 여행 길위의 철학을 3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가 싶다.

1, 에피소드 구성자체가 그리스 철학부터
 실존주의 니체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을 열거함으로 조금은 흥미롭게 구성을 했다는 측면에 반갑다,

 또한 그들의 작은 성찰과 철학적 지위를 깨우치고 노력하는 오직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담백하게 소개하고 각자 한사람의 인생을 엿볼수있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내머리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시대적 상황 등등..

무식의 소치로 메모리 되어지지않는 것은 흠으로 남는다.


2, 노동과 길위의 만남을 통한 그들만의 열정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일상에서의

방랑을 창조적으로  보여줌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할 수도 있을텐데 현실과 연대하여

노동과  자신이 피력하고자하는 철학적 논제를 경험과 열정으로 가치를 세웠다는 것이

참으로 현대를 사는 나로서는 부끄러울 뿐이다.


3. 깨달음으로 표현하기 쉽지 않을 삶을 디자인하는 그들만의 방법적 실행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철학자들의 고행은 남다르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철학의 진지함이 책을 통해 적어도 실패를 두려워 하지않는 불안한 미래를 개척해

나갈수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아주 괜찮은 책이라 말하고 싶다.


아프리카 청년의 아우구스투스의 기독교 정립에 관한 밀라노의 여행,

 이슬람 종교의 기둥을 만든 이븐시나, 알가잘리도 또하나의 배움으로 다가옴은 여행을 통한

진실의 만남이 어떠한 문제를 의심하여 평생 고통속에 갈등하는 것보다 문제제기를 통해

자신에게서 답을 찾는 유용한 도구로서 여행은 훌륭한 것이아닌가 싶다,


토마스 아쿠나스의 진실탐구도 유머스런 그의 몸집때문에 자칫 가벼워질 뻔한 느낌이

있었으나 엄격하고 설득력있는 철학적 탐구는 오늘날 철학의 대가로 우뚝서는데 공감을 자극한다.

루소의 목적지 없는 여행?
젊은 시절 나와 비슷한 취향의 형태의 여행, 노마디즘 형태의 여행. 만남의 우연성
어딘가에 이르기 위한 여행이기보다는 오로지 떠나는 기쁨을 즐기는 여행.

물리적 도덕적압박으로 부터의 해방. 완전한 자연에의 몰입. 우주와 하나됨을
의식 속 존재의 감정을 깨우는 철학적 사유의 기반..

여행은 가끔 이런 형태의 여행도 바람직 하지 않나 싶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정처없는 나그네..

이번에 새롭게 알게된 역사적 지식.
아리스토 텔레스. 프로타고라스 디오니게스
아테네의 시민이 아니였다는 사실.. 그냥 여행자이며 이방인이였다는 사실이 깜놀..

니이체에 대한 그의 여행 행태는 인간주의적 사슬로부터의 자신의 사유를

해방하려는 몸부림 같은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광기를 동반한
여행을 바라보자니 측은 지심이 들기도 한다.


화려한 철학자들의 각자 다른 방식의 여행길,
그 여행을 통해 각자의 세계관과 철학의 지위를 얻은 행태,

낯선길을 따라 자유의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


그것은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단순한 여행자의 소개가 아니고 우리가 알지못했던 지식적 해학을 던져주는

여행길위의 감동과 사색에대해 신나게 풀어놓는 수다와 같은 기분 좋은 풍경이

예상치 못한 선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알랭드보통의 소설 속에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 중 하나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의 화자는 여자이며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이야기라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의 화자는 남자이며 나와 클로이의 사랑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펼쳐 나가는 사랑의 드라마이지만 시작과 전개는 대단히 흡사하다 아마도 모든 남녀의

운우지정.,. 사랑의 이야기는 이렇게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ㅋㅋ 그러나 각자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성과 감정들..

앨리스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클로이를 사랑하는 나와는 참 많이 다름을 느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느낀다고 나 할까?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여자가 이별을 하면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이 아니었구나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잊어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는 반면, 남자가 이별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미련을

곰탱이처럼 부리는 차이가 바로 여자와 남자의 관점과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싶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주 섬세한 사랑의 감성을 사유와 담론의 장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은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끌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이 책을 보면서 지독한 사랑을 해봤거나

혹은 사랑을 해보지 않았더라도 24가지의 이야기 속에 깊이 있는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사랑과의 차이는 뭘 까? 비교가 되는 의미를 주는 책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사랑이 끝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과정 끝나버린 사랑의 상처를 지우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유적인 관점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랑의 진행 과정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철학적 이론과 연관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있다는 점이 새롭다..


연애와 철학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인데 알랭드보통은 신선하게도 연애와 철학의

둘을 잘 엮어 이야기를 풀어 간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와 클로이의 만남.. 흔히들 로망으로 생각하는

비행기안의 조우.. 그리고 운명적으로 빠져버리는 사랑..

 

다른 연인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소한 싸움과 화해의 반복..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과정.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노래처럼 클로이와 주인공 친구인 윌과의 새로운 만남.

그리고 헤어짐.. 너무도 통속적인 사랑이야기 속에 페이소스와 사랑의 가치를 조금 더 성숙하고

가치 있게 표현해 내는 알랭드보통의 글의 구성은 마음의 짠함을 느끼게 만든다.


사랑이 끝나고 좌절과 우울의 나날. 자살 시도

(나는 과연 실연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할 수 있을까 갚은 고민?)

그리고 다시금 회생하는 과정.. 그리고 디너파티에서 만나는 새로운 운명 레이첼과의 만남.. 
일인칭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소재 그간의 통속적 소설의 구성과는

조금은 다른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어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책이다. 


연애의 심리변화를 작가의 일인칭 해설로 자세히 이야기 한다는 것.. 마치 연애 편지나 일기장을 훔쳐보는

관음증 같은 느낌으로 읽게 되는데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게 대체적으로 극적인 드라마 적

감정의 소비를 담은 일상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라면 이 책은 남녀 간의 사랑과 인간관계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알랭드보통만의 특유의 철학적 사변과 성찰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좀 더 인문학 적인 깊이와 섬세함이 깃든

소설이 아닌가 싶다.


아주 읽을 만한 책이고, 더구나 25살의 청년이 썼다는 게 아주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난 25살 때 뭐했나??

군대에서 뺑 이치고 복학을 할 때였나? ㅋㅋ 낭만적 운명론에서 사랑의 교훈이라는 24가지의 담론.
사랑을 할 때는 순수해지고 이별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성숙의 발전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사랑에 상처 때문에

사랑에 겁먹고 주저할 필요는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랑이라는 정의는 각 개인의 사유를 통해 여러 가지로

나타낼 수 있으나 통찰과 깨달음이 생기고 일상을 해석 할 수 있다면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담론..

  1. 내게 사랑이 찾아 온다면 어떻게 그 사랑을 받아 드릴 것인가?
  2. 정말 사랑은 운명론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3.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답 받을 수 없는 마르크스적 감정이라고 하는데 즉 목표를 성찰(섹스를 통한 합일이건 어떤 식이건) 사랑하는 사람을
  4. 소유하면 소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5. 상호간의 사랑은 진정 불가능한 것이고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블러그를 찾아 글을 올리는 것 같다.

몸도 아프고 생활도 별로 변화가 없고 하다보니 블러그에 글을 쓸 이벤트가

없었다는게 딱 맞는 말일 것이다.

 

사실 이번달 독서모임 발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할 입장인데

아무리 책을 구입하려 하여도 절판이되어 살 수가 없다.

대형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등.. 여러곳을 찾아 다니고

그래도 열성을 보였으나 결국 책을 구입할 수 없었다.

 

결국 아주 오래된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와 읽게된 책이 바로 칼잡이...다.

사놓고 방치되어있다가 눈에 띈 책인데 뒤늦게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인셈이다.

독서모임 발제 책을 못읽어 맹하니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는하나

그래도 오랫만에 독서부담에서 벗어난다 생각하니 홀가분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작가와 칼잡이들의 이야기를 한 데 묶어둔 책이다.
작가는 각 단편이 짧아서인지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서 모호한 느낌을 받는다.
‘꿈의 호랑이들’에서 꿈을 조작함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못하는 상황에 동감했다.
보르헤스도 그랬구나.


‘한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이다. ('마르틴 피에로’ p.46)


김지하는 틈에서 "인간의 뇌수 속에는 파충류 적 기억까지 살아있다."고 말했는데,
같은 말이거니 생각했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운동하는 이야기이다.


"저기 그들이 온다. 신들이, 신들이." 그리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신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다."(’꿈‘ p.61)


그러나 인간 보르헤스가 창조한 신은 말한다.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전체와 무’p.59)


칼잡이들의 이야기는 불한당들의 세계사와 밀접하다.
살인의 주체가 인간에서 "단검"으로 바뀌고 (만남),
단검은 카인의 돌맹이로 "예수의 십자가"로
링컨을 쏜 탄환으로 윤회한다 (케네디를 추모하며).
그리고 결투가 꼭 단검이나 장검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투)

 
주체와 객체의 혼돈이 매우 새롭다.
"부르디의 보고서"는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하동"을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걸리버여행기"로 눈길을 돌린다.


"끼어든 여자"는 불의의 정당함과 가우초적 태도에 대해.
"마가복음"은 충격적 결말에 감탄하였다.

허나 거장 앞에 쫄지 말아야 한다. 내가 생각한 마지막 소신이기도하다.ㅋㅋ

이런 자괘감이란...??

 

 

 

아주 유명한 광고 하나가 있다
카메라 광고로 기억이 되는데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간관 혹은 역사관을 함축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또 하나의 책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무라까미 하루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실제로 하루키 소설속 다자키 스쿠루는 이름속에 색채가 없기도 하거니와
본인 스스로는 자신은 색채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대부분의 평범함의 미덕은 자신은 중성적인 색이거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예감은 틀리지않는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토니는 말그대로
색채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고 그렇게 살아왔다.
다자키 스크루가 순례를 떠나기 전까지 그의 일상사와 다를바없는 평범한 토니,


사라가 스쿠루에게 순례를 떠나기를 종용하는 것 같이 토니 역시 40년이 지난후
베로니카라는 옛애인의 모친이 보내온 유산분배와 편지를 받기전까지의 모습과
그렇게 다를바 없는 것 같다.


이 두책의 기록이주는 메인 테마는 바로...
기억은 덮어 둘수는 있지만, 각 개인이 가지는 역사는 지울수 없다. 이다
다시말해 개인이 가지는 역사를 지운다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고
죽이는 것과 마찮가지라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두책의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통찰하고 회고 하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라고 번역했지만
노르웨이 숲에서 보여주듯이 상실감을 가진 자아가 점점 자신을 성찰 혹은 회고 함으로
회복해 나가는 그 과정, 역시 마찮가지로 토니나 쓰쿠루 두 주인공은 자신의 성찰과 회고를
통해 모든것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설속에서 보여준다.


성찰을 낳는 것은 아픔이지만 줄리언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소설은
부정과 자아의 상실를 통해 자신의 껍질을 깨는 성장소설과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껍질을 만들어 숨어버리기 보다는 과감히 껍질을 깨고 번데기에서 나비로 성장해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는 지울수도 다시 만들어 낼수도 없는 나 자신을 죽이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보면...

소설적 완성도와 비극적 테마..
비극적인 분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가 주는 분위기는 참으로 쓰라리고도 아름다운 뭔가 그런게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시간, 역사, 기억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에 짜넣은 작품이 아닌가싶다.
스스로 "평균치 인생"이라고 칭하는 삶을 사는 화자 토니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젊은 날의 기억
대학 때 잠시 사귄 여자친구 베로니카가 헤어진 후 자신의 친한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부터
이야기는 파생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토니는 상당히 기억력이 현실적인 것을 보게 되는데.
나 역시 토니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다.
어떤 것은 엉뚱하게 기억하고 어떤 것은 통째로 잊어버린다. 어떤것은 정말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잊혀지지않고 기억속에 머무는 것도 있다.
 

우리들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추억은 실제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밝기 마련이다.
그래서 죽을 것 같았던 아픔도 향수나 추억을 더듬어보면 이해될 수 있는
그리고 아프지만 그럭저럭 아름다웠다로 평가 내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늙은 토니가 자신의 기억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낸 1부를 이미 읽고
2부로 넘어온 기억과 다른 사실과 맞닿뜨린다.
그렇다보니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나 역시 통째로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몇번이나 앞으로 다시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삶이 이렇게도 모호하고 불분명한데 우리가 배우고 사실이라고
"믿고있는" 역사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 진실이라는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아니 어쩌면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한
"자기보존본능"에 의해 직조된 나만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내 말 한마디
혹은 행동의 돌덩이가 타인에게 미치는 파문을 나는 어떻게 조정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과 개인이라는 미시적인 조각을 모두 아우르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짧지만 깊은 소설이었다고 자평한다.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놓치기 너무 아깝다.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다양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 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홍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거의 명언의 반열에 오를만한 표현도 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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