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교회를 다녀왔다.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다녀온 교회.. 내게 있어서 신앙심이란 무엇일까?
술자리, 혹은 어느 모임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해 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일년에 세번 교회를 가는
정말 제도권내의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사이비 교인이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무슨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텍스트가 주는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의 의무라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기독교인 이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거다 저거다를 택할 수 없는 모태신앙,
그 모태 신앙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린 시절 종교적 방황이 누구보다 많았던거 같다.
난 그 종교적 방황을 마무리 하기위해 안 믿어 본 종교가 없는 것 같다.
 

중학교 2학년때로 기억이 난다. 한겨울 포장마차 호떡집에서 어느 고등학교 누나가
사준 호떡을 먹고 창신동 허름한 종교 집단에 참여 한 기억도 난다.
지금은 종교의 한 축을 이루었다고 생각이 드나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이 종교가 왜 존재 하는가에 대해 회의에 빠짐 적이 있었다,
남묘호량계교 이발음이 정식으로 맞는지 모르겠다,
 

그 뒤 모슬렘에 빠져 한동안 코란 경전을 옆에 끼고 이태원에를 열심히 다닌 적도 있다,
나의 종교적 행태는 묘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무책임한 종교적 행각은 대학을 들어가 다시 원상 복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원상복귀란 보수적 신학과는 거리가 조금은 먼 하나님 받들기 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나 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 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새끼만 챙기는 내 어머니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적 방황을 마무리 한 후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일 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의 신체변화가 일어나고 곧츄에 털이 한가닥씩 나기 시작해서 제법 북실거릴때도
내 관심은 공부보다는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 같은 학생,
그래도 대학은 들어가야 한다는 어머님의 권고를 받아 드렸고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 없는 날들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보수적인 신학만이 전부였던 그때 내가 배운 건 민중을 위한 신학,
해방신학에 눈을 뜨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ㅅㄴㄷ 교수를
만나기 위해 신촌 연대를 사계절 내내 찾아 다녔더랬다.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 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 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어머니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사회 참여로 잘 알려진 분이었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 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 식 예수 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지금 나는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그 고단한 삶을 행복함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아직도 그 청년에게 미련을
갖게 하나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그래서 기독교인인 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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