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서 전쟁을 벌이기 힘들게 된 마당에
소비진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예술의 기능이라고 하였다는군요,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것"
                                 -김용옥의 <석도화론> 


예술의 소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소개글 입니다,
김훈의 "글을 쓴다는 행위는 " 의미의 무게를 이끌고 가는 노역의 행위"
<풍경과 상처> 라는 책에 나와있는것 처럼, 영상을 언어화하는 것은
그 의미를 캐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자의 관점이 다르기에 다른 관점의 비교를 통하여 영화를 봐왔는데요,
<은교>의 경우는 유달리 더 그러했습니다,
주관적 해석의 다양한 길을 열어주는 입체적 인간상의 모습이 신선하였습니다
어찌보면 원작에서 추구하는 철학적 가치보다는 영상으로 보여줘야하는
단도직입적인 사실은 글에서 나타내주는 그것보다 훨씬 레알이고 직설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다보니 박범신 작가도 우려했던 자신이 표현코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섹스적 욕망.
인간의 추악함, 이런것들을 많이 표현했다 하더군요. 글은 내면의 세계에대해 구체적으로
글로 아름답게 표현 가능할 수 있으나 영상은 내면의 그것을 무엇으로 보여주겠습니까?
마침 인도영화인 <하늘이 보내준 딸>을 보았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로서는 은교라는 영화는 "인정에의 욕구"라는 한마디로 귀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1. 서지우와 은교의 이적요로부터의 인정.

 

2. 이적요의 은교로부터의 감성적 사랑의 인정

 

3. 서지우는 이적요의 욕망을 모방(지라르)하여 은교를 욕망하게 된 것.
결국 이적요처럼의 창작과 같은 예술적 영감의 에네르기를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기에
은교의 육체를 탐하게 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기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 작품 <은교>에 대한 질투가 은교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되어 빚어진 것으로 이 역시 인정받고자 하는 것.


4. 은교의 경우는 (남의 집에 허락없이 들어온 것,
고딩으로 출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물좋은(?) 식당을 이미 알고 있었던,
영화의 절정인 낮아지는 피아노 선율과 함께 지하서재로 내려가는 것,
첫경험으로 보기에는 의혹이 드는 장면으로 인하여 단순하게 순수로 규정지을 것은 아니고
요즘의 세태로 보면 아주 드문 열린 감성의 조숙한 인물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자
욕구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이상화한 스스로도 몰랐던 <은교>속의 자신에 대한 아름다움에의 발견자가
서지우인 줄 알고서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
그래서 "외로움때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마도 원작의 한계일 것이라 짐작할 뿐입니다,


그 "외로움"을 이유로 든 것은 서지우의 경우가 먼저이므로 감성이 열렸다 하더라도
이성이 깨인 것이 아닌 실수할 수 있는 나이인 은교로서는 자신의 인정에의 욕구를
달리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감성이 열렸다고 해서 어떤 책임을 질 이성적 판단의 담지자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경계인의 존재이기에. 해서 결국 이러한 인정에의 욕구로써의 서지우와의 정사가
가짜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으로 귀결된 것이니 영화 <시라노>와 흡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담을 넘어 열린 사다리가 소통의 도구였다면,
관객이라는 엿봄의 주체를 희화화한 그 서재로의 사다리는 살인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도구였습니다,
특히나 두번째 사다리는 은교와 서지우를 엿보는 이적요와 이를 관람하는 관객이라는
중층적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관음의 향유 주체는 결국 관객이니.....
나이를 드는 것이 좌절이 아니라 체념할 줄 아는 것이지 않을까요?


세월의 흘러감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
욕망의 부질없음을 몸 스스로 알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게됩니다.
영화를 보셨으면 원작을 한번 더 리딩을 해보시면 어디가 다른가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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