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날..
올 가을은 의식에 감촉되는 나무며 잎새 그리고 풍경의 인상이 소슬하고
인간존재의 너무도 미약함 앞에 심약해집니다. 내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제 무력함 앞에 마음이 우울할때 나를 보듬어 주었던 것은 무엇이였을까?


사람에게 치유받기 원했던 삶은, 계절의 바람에 스쳐 허무하게 지나가고
또 다른 치유를 위해 부활하는 기다림을 잉태한다는 것...
부정을 넘어선 긍정의 유유함을 이 가을 시월의 마지막 날에 주고 있는듯 싶습니다


내 마음 속에 호젓함으로 다가오는 그 청정함의 사랑,
물론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의 구정물 같은 사랑일 수도 있을겁니다.
조금은 세상의 풍진으로 흐려지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세속의 찌든 실존은
성숙한 의미로만 남아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걸 누구에게  탓할 수 없음이지요.


내 현실 상황 속에서 세상의 말들이 지니고 있는 풍진으로 인해

내 머리 속의 빛깔들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공백으로 고갈되어 버린 두뇌,

자기의 본체도 투시할 수 없는 사색의정지, 마치 살아있는 송장처럼

산다는 의미조차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다시 나의 내부에 영혼의 씨름이 시작될 때면 결정적인 오뇌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의 본체를 되찾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내적 인간 실존을 심어주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내가 믿고 따르는 신이며 절대자 예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삶의 귀결은 언제나 미지의 숙제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약간씩 그 미지의 윤곽을 부각 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내 의식속에 깊은 존재의 만남으로 여운을 남겨주는 환상적인 음악 하나가 있지요.


사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를 동경했었더랬습니다
그러나 나는 음악을 전공하지도 못했고 악기 하나도 다룰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지요.

음악성이 받춰주지않는 너무도 박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변함없이 지금까지 연인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합니다.


산골짜기에서 졸졸거리며 흐르는 냇물처럼 조용히,

때로는 폭풍처럼 웅장하게 파동쳐 오는 리듬의 굴곡 속에서 나는 자기를 잊고

황홀하게 도취되곤 합니다. 서글픈 흐느낌처럼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처럼

굽이쳐 오르는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소박한 트럼펫의 음이 전해주는

외로운 여운과 청아한 피아노의 선율은 나에게 푸른 꿈을 가끔은 안겨줍니다


그리고 그런 음악에의 애착이 지식과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 나를 인도하곤 합니다.
이렇게 잠시나마 무아의 경지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때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석양의 저녁 숲 바라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주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나를 바라다 보며 손짓 하는 듯 했습니다.
석양이 주는 환상은 때론 폭풍우처럼 밀려드는 형체 모를 하나의 감정으로
때로는 원시림 속의 잔잔한 호수처럼 가눌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오늘 시월이 가는 마지막날 환상처럼 떠오르는 곡 하나가

바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입니다. 금방 확하고 떠오르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선율이고 귀에 익숙한 클래식 곡일겁니다.

특히 2악장에 나오는 왈츠는 아~ 맞아 이곡이구나 하는 탄성을 지를 것 입니다.


레오나드 번스타인 지휘자가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1976년에 녹음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들을 때마다 나는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를 떠올리게 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물론, 실제로 푸르트뱅글러가 <환상교향곡>을 어떻게 지휘해냈는지 저는 들어본 적이 없어 모릅니다.
다만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환상 교향곡>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이랄까 박력이랄까?...
요컨대 다른 지휘자가 결코 구현해내지 못하는 어떤 고강도의 집중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특성이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빛을 발하는 푸르트뱅글러의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고밀도의 정서와 감흥 혹은 음악의 혼(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과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푸르트뱅글러가 <환상 교향곡>을 레오나드 번스타인처럼 지휘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적어도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환상 교향곡>에서
푸르트뱅글러적인 어떤 음악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해서, 푸르트뱅글러와 그 음악적 스타일에서 가장 가까운 지휘자는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쎄요, 푸르트뱅글러와 레오나드 번스타인 간의 친연관계를 이런 식으로 예단하는 것은 섣부른 처사 일까요?...
요는, 푸르트뱅글러의 <환상 교향곡>을 들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유투브를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고 다행이도 레오나드 번스타인 지휘로는 있네요
한번 들어보세요. 시월의 마지막날 현실은 괴롭고 힘들지만 환상교향곡 한곡들으시면서 힘냅시다.  

 

 

1악장 : 꿈, 정열 / Rêveries – Passions (Daydreams – Passions)
한 저명한 작가가, "정열의 파도"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 한 젊은 음악가가,

맘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매력을 다 갖춘 여성을 처음 만나, 무서운 사랑에 빠진다고 작자는 상상한다.

왠지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하나의 악상과 결합되어 그의 마음에 들어온다.

 

그는 그 악상의 정열적인, 그러나 기품이 있고 내성적인 성격이 그녀의 성격과 같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 선율과 그녀의 모습이 이중의 고정개념(악상)으로서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닌다.

이 교향곡의 각 악장에 , 첫 알레그로의 개시의 선율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울한 몽상상태에서 , 착란한 정열에 이르기"까지의 경과가, 분노와 질투, 마음의 평안, 눈물,

종교적인 안위가 섞여 제 1악장의 소재가 되어 있다.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1st movement: part 1: Largo (Rêveries), Paris, 1976

 

2 악장 : 무도회 / Un bal (A ball)
그 음악가는 자기가 인생의 가장 복잡한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소용돌이 속에 끼어 들기도 하고 자연미의 평안한 사념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도 들에서도 어디를 가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3 악장 : 들 풍경 / Scène aux champs (Scene in the Country)
시골에서의 어느날 저녁, 멀리서 두 목동이 부는 목적 소리가 들린다.

이 목가적 이중주, 주위 환경 미풍으로 조용히 살랑이는 나무들의 속삭임,

그가 최근에 발견한 희망의 싹, 이러한 모든 것이 결부되어,

그의 마음을 이상하게 평온하게 하고, 그의 생각을 밝게 물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고독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이젠 고독을 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 그러나 만약 그녀가 모른다고 배신한다면 - 이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기분, 어두운 예감으로

어지럽혀지는 이러한 행복의 사념이, 아다지오 악장의 주제가 되어있다.

마지막에 목동의 한 사람이 다시 목적을 부는데 상대는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멀리서 천둥소리...고독...정적...

 

 

 

 

4 악장 : 단두대로의 행진 / Marche au supplice (March to the Scaffold)

그의 사랑이 거절되었음을 확실히 안 작곡가는 아편으로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치사량에 이르지 못하여, 그는 무서운 환상을 수반한 깊은 잠에 떨어진다.

그는 애인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 받고, 단두대에 연행되어 자신의 처형을 보는 꿈을 꾼다.

행렬을 , 때로는 음울하고 거칠며, 때로는 당당하고 밝은 행진곡의 소리에 맞추어 행진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굉장한 시끄러움을 타고 계속된다.

행진 끝에 고정악상을 나타내는 4개의 소절이 사랑의 마지막 추억처럼 다시 나타나는데

오케스트라의 결정적인 일격으로 지워져 버리고 만다.

 

 

 

5 악장 : 마녀들의 밤의 향연의 꿈 / Songe d'une nuit de sabbat (Dream of a Witches' Sabbath)

그는 그를 매장하기 위해서 모인 무서운 유령, 마술사, 마녀,

그밖에 갖가지 요괴들의 일단이 한 가운데에 있는 그를 본다.

야릇한 소리, 신음, 오싹하는 웃음,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다른 고함소리가 호응하는 듯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고귀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 야비한 선율에 불고하고, 보잘 것 없는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가 이 밤의 향연에 찾아온다. 그녀가 도착하자 환희하는 요괴들의 떠들음...그녀는 악마적인 밤의 향연에 낀다.

장례의 종은 "분노의 눈"의 익살광대의 풍자다. 밤의 향연의 윤무. 윤무는 "분노의 눈"과 결합한다.

위의 장황한 설명은 다시 개작되어 전체 악장을 아편의 작용에 의해 생긴 괴기한 환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그 대요를 적어 보면 [병적인 감수성과 격렬한 상상력을 지닌 젊은 예술가가 사랑의 번민으로

절망의 구렁에서 아편 자살을 꾀한다. 그러나 복용량이 적어서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기괴한 일련의 몽환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은 하나의 선율로서 나타난다.] 라는 이상 성격적인 것이다.

 

 

 

위의 해설에 대해서 너무 강박적으로 얽매이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곡가가 감상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곡에 대한 심상을 불어넣기 위한 도구로써

환상교향곡에 대한 감정을 북돋워주는 역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자들은 자신이 의도한 환상교향곡의 충분한 이미지를 감상자에 충실하게 전달하면 된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느낌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동일한 모습의 환상을 바라는 것은

그렇게 마땅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곡의 연주라는 재창조의 의미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출처 : http://www.goclassic.co.kr/review/9904a.html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