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맛비가 퇴근시간에 때맞춰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 시간, 고스란히 비에 젖은 처량함과 고독감이
차츰차츰 어느 틈엔지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눈물겹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울대를 넘지 못하고 다시 속으로 흘러내려서는 온몸을 적시고는
숨조차 고르지 못하도록 가슴을 메우고, 목을 메우고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혼자 사는 삶이라서 그러지 싶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부정을 해봅니다.


고독하다는 것에는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몸...?
누가 굳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일다가도 자락이 잡히기도 전에
가라앉는 삶이니, 해가 바뀌고 나이 하나 더 든다고 달라질 까닭이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내리는 비를 보고 슬퍼진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를일 입니다.
하긴 내리는 빗줄기야 가을비가 봄비보다 더 처량할 터이요,
어제처럼 한여름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와 함께 온 땅을 적시는 장대비에서도
울음을 토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내리는 비란 온갖 때(垢)로 가득한 자연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나면 앞산도 더욱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고, 삼라만상 모든 것의 자태가 맑고
고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침녘에 긴 밤 기나긴 꿈으로 젖은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와,
한밤에 하루 일과로 지친 고단한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더없이 경건하고 신성한 노동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겹겹이 앉은 겉의 때를 씻어내는 그 조그만 시간은 그래서 더없이 진중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물을 쓰는 일이 겉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라고 한다면, 속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는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에티카(Poetica)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것도 어깨를 들썩이거나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눈물은 겉으로 쏟아져 나오질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흘러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런 기억을 갖고 계십니까?
오래된 영화에서나 흘러나오는듯한, 잡음 많이 낀 오래된 레코드 판처럼...
머릿속에서 힘겹게 돌아가며 아련한 음악을 쏟아내는 음성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빌리홀리데이의 음성입니다.


장대비가 그렇게 내리면 수많은 스크래치는 갸냘픈 신경사이를 배회하며
꿈결인듯 오래된 시간 사이를 헤매며 나의 속때를 벗겨내는 듯 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저 먼 시간 속으로,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그 아득한 경험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갑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오릅니다. 추억을 한다는 것은 더 괴로운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조그마한 공간밖에 둘러볼 줄 모르는 나는,
오직 내 몸뚱이 하나밖에 가리지 못하는, 참으로 이기적인 우산을 받쳐들고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빗속에서 갈 곳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까닭없이 우울했고 이유없이 슬펐으며 근거없이 외로웠고 건방지게도,
삶이 싫어지고 있었습니다. 위태롭게 지속된 사랑은 이제 곧 나를 떠나려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막바지에 다다른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슴 저리고 있었습니다.
삶이란 것이 빗물처럼, 형체없는 물처럼, 투명한 그 물빛처럼 그러하기를 원하고
있었는지 모를일입니다.


그날도 어제와같이 빗속에서 우산이 젖고 바지단이 젖고 마음이 젖어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서점에를 들어갔습니다.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통로, 날 갑갑하게 옥죄고 있는 사랑으로부터 날 구해줄
무언가를 나는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김갑수씨의 책입니다.


서점에는 그 책이 다소곳이 놓여있었습니다.
글쎄...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삶이 과연 남들보다 더 괴로운 것이고
남들보다 더 할 이야기가 많으며 남들보다 더 아파해야 할 것인지를?...
하지만 그 비 많던 7월의 어느 날 그 책은, 아니 그 책의 제목은 제 가슴으로 파고들어
내 삶이 그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게 괴로운 것이라는 최면을 걸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집어들었고 그리고......
음악을, 아니 재즈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나는 내내 빌리 홀리데이의 테잎을 듣고 있었습니다.

 

        

낡은 워크맨에 끼워넣어 회사를 오가는 길가 에서나 잠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깊은 밤이거나 빌리의 음성이 내 귓가를 채우도록 만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성은 빌리의 그것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었고 나에게는 먼나라의 이방의 언어처럼 낯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리가 근 한달이나 내 귓가에서 노래를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새된 목소리, 터무니 없이 작고 터무니 없이 힘 빠진 듯한 목소리에
나는 적응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김갑수의 그 책을 만났고 사랑이 날 흔들리게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재즈로 향한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다시 재즈에 옥죄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의 사랑만큼은 날 힘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재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시간...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오래된 시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의 생애는 57년까지였으니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악은 당연히 오래된 음반입니다.
더구나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 였으므로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성에는
지금의 완벽한 음향 사운드 시대에서 볼 때 형편없는 빈약함과 터무니없는 허약함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에는 지금의 기계 빛 음악이 줄 수 없는 어떤 아련한 추억과 쓸쓸함과
허무 혹은 낭만이 전해져 옵니다. 디지털 시대의 복원 기술로도 다 해결할 수 없는
스크래치와 잡음과 음향의 빈약함은 채워질 수 없음으로 인해 더더욱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갖고 계십니까.
머리 속에서는 오래된, 잡음 많은 레코드 판이 돌아가고 어딘지도 모를 과거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복귀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빌리의 음성을 들으며
그 오래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본 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빌리와 함께 잡음 많고 비가 내리는 그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어떨지 한번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방과 서울은 기후에 큰 편차가 있네요
서울은 후덥지근하고 왠지모를 짜증이 넘쳐나는 날씨입니다. 아마도 충청이남
지방은 폭우로인해 비피해가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빌리의 음반을 하나 소개합니다.
Billie Holiday-Strange Fruit : 1935-1944 New York ~ Los Angeles
재즈 음반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를 드나들어 보신 분은 아마도 이 음반을 아실 겁니다.
두 장짜리 음반에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지요.


아마 12000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굿(good)'이라는 음반사에서 나왔습니다.
가격이나 기획에 비해 음반의 내용은 참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인데 이 음반에는 그 시대의 대표곡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사실 나는 빌리 홀리데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재즈로 이끈 시발점으로서
혹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애도로서
이 음반을 구입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재즈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낡은 음악이 내게로 가져다 주는 오래된 시간까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 앨범에서의 몇곡을 올려놓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