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도의 적당함 보다는 73도의 아찔한 온기를" 이란 타이틀을 오늘은 걸어야 할 듯 싶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 관계로 혼자보다 둘이면 좋겠다는 공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二熱治熱이란 유머가 생각 났다. 열 두개 즉 73도로 열 하나 36.5도를 다스리자 란 말이니
섹스로 더위를 극복하자 란 뜻이 되겠다. ㅡ..ㅡ;;;


낯선 것 과의 화해.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지나 화합해 나가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 살아 있는 예술이다.
살아 있는 예술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허울을 벗은 알몸과 같은 순수가 상통 하며 육체에 관한,
그리고 정신에 관한 모든 관습들이 스스로 를 구속하던 외로움의 껍질을 깨고 하나로 모여든다.


바그다드 카페...이슬람의 이름이다.
그 카페의 주인은 흑인이면서도 또한 여성이다. 종업원은 라틴계 청년이며,
그지역 치안 을 관할하는 보안관은 아시아에 뿌리를 둔 다름아닌 인디언 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울려 사는 곳에 찾아올 또 한 명의 이방인은 유럽인이 될 것이 자연스러운데
역시나 그 사람은 쟈스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뚱뚱하고 볼품업는 독일인이다.


그리고 그 곳엔 뇌쇄적이면서도 폐쇄적인 데드라는 여인이 있어 가끔씩 들르는 트럭 운전사 들 에게
문신을 새겨 주고 때로는 몸을 섞고 화 대를 받는 따위의 일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바그다드 까페엔 그들만의 각자의 일상과 흘러 지나가는 트럭운 전사들의 상호소통없는
일회성 방문이 있을 뿐, 커피메이커 한 대 고장나 버려도 금방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단조롭고
건조한 나날이 연속이다.


전 지구를 근대화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으며 여전히 무 너지지 않는 서구문명의 주인공인
유럽인이 이곳에선 이미 모 든 인종이 미리 머물러 있는 곳의 이방인일 뿐이지만,
쟈스민 은 서구문명이 가진 최대의 장점인 개방성과 자유분방함을 살려 흐트러지고 침체되어 있던
까페에 새로운 삶의 활력을 일으 킨다.

 

그러나, 원래의 것과 이방의 것이 서로 소통하는 사이에는 지금껏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전반을
제어하던 세상의 논리 가 있기 이전에, 각자의 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성실함과,
타인의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전제로 한 아주 기본적인 '마술' 이라는 엉뚱한 매개체가 있다.


독일여자 쟈스민은 모텔 방에 쳐박혀 있던 마술세트를 열어 하나씩 익힌 후에 바그다드 까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재미삼아 선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논리적 대화도 없이, 정감어린 포옹도 없이 그들은 오직 마술같이 신기하게 한 가족이 되며,
그러는 사이 서로 단절되어 있던 마음들이 사실은 지극히 서로를 의지하며 그리워해 왔음을
조금 씩 알게 되고, 문명과 인종을 넘어선 한 가족이 된다.

 
참된 마음의 눈은 모든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실제의 풍만한 속살을 대함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이미, 오직 자기것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린 세상이 라 겉으로만 부르짓는 범세계적인 화합이란
공허한 메아리로 울 릴 뿐이다. 마술아닌 현실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현 실같은 마술에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은, 서로 통하는 사람끼리 는 함께 경험하게 되는 그러한 '환영'은 아닐런지...

 

 

 


 

 

 

8월의 첫날부터 우연히 발견한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

아주 오래전에 이 영화를 봤을때도 리뷰를 쓴 기억이 나는데 블러그에는

포스팅을 하지않았는지 없다. 없으면 어떤가?

 

지금도 커피는 좋아하지만 한때 나도 헤비스모커라는 소리를 듣고 산적이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이 영화가 주는 유혹은 참으로 정겹다.

8월 시작하는 첫날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무아지경이랄까. 그러면서도 응근히 걱정을 돼네.. 이렇게 일이없으면 안돼는데?

그래도 옛추억을 더듬으며 영화를 한편 본다는 것이 참 좋은것 같다,

 

바하의 커피 칸타타에는 커피를 무척 좋아라~ 하는 아가씨의 얘기가 나온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피를 마시게 해주는 남자와 결혼 할 것이라는 이 아가씨의 노래에
이미 18세기 커피 하우스가 등장하며,
커피에 중독되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공감을 하였을까?

 

커피와 담배를 얘기 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중독은
짐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에서도 그 중심을 차지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손을 떨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 ..덜덜덜 ...영화의 시작이다.

 

흑인 오누이가 서로 장난치며 커피와 담배를 마시는 장면은
이 두 명이 커피와 담배를 상징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지.
 

"너희 둘 중에 누가 더 성질이 더러워? !!"


웨이터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100년 후에는 오늘날 예수와도 같은 종교적 성인으로 추앙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엘비스 프레슬리.
이런 우리가 지금 누리는 오락이나 기호가 종교적인 상징으로 까지 승화하는 어떤 상징성의
기작에 대해 감독은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하다.


휴식을 취하고 평소 친분이 있거나 오랫간만에 만난 사람들이 농담을 주고 받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광경으로 영화는 이루어 지지만,
커피를 마시는 동안 수 많은 담소들 안에,
우리 인간세상의 권력이나 배신, 아첨의 욕구를 발견한다.


예쁜 여자가 커피와 담배를 마시는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중독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닐지. 사랑이 가지는 끊없는 나락과 담배 연기
달콤함에서 쓴맛으로 이어지는 커피 맛의 전개는 무척이나 닮아 있다.


인생이라는 축제를 즐기고, 커피를 샴페인 처럼 건배한 후
죽는 노인의 이야기..이 영화의 엔딩이다.
블랙코미디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 영화.

 

 

 

 

 

백남준이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서 전쟁을 벌이기 힘들게 된 마당에
소비진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예술의 기능이라고 하였다는군요,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것"
                                 -김용옥의 <석도화론> 


예술의 소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소개글 입니다,
김훈의 "글을 쓴다는 행위는 " 의미의 무게를 이끌고 가는 노역의 행위"
<풍경과 상처> 라는 책에 나와있는것 처럼, 영상을 언어화하는 것은
그 의미를 캐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자의 관점이 다르기에 다른 관점의 비교를 통하여 영화를 봐왔는데요,
<은교>의 경우는 유달리 더 그러했습니다,
주관적 해석의 다양한 길을 열어주는 입체적 인간상의 모습이 신선하였습니다
어찌보면 원작에서 추구하는 철학적 가치보다는 영상으로 보여줘야하는
단도직입적인 사실은 글에서 나타내주는 그것보다 훨씬 레알이고 직설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다보니 박범신 작가도 우려했던 자신이 표현코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섹스적 욕망.
인간의 추악함, 이런것들을 많이 표현했다 하더군요. 글은 내면의 세계에대해 구체적으로
글로 아름답게 표현 가능할 수 있으나 영상은 내면의 그것을 무엇으로 보여주겠습니까?
마침 인도영화인 <하늘이 보내준 딸>을 보았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로서는 은교라는 영화는 "인정에의 욕구"라는 한마디로 귀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1. 서지우와 은교의 이적요로부터의 인정.

 

2. 이적요의 은교로부터의 감성적 사랑의 인정

 

3. 서지우는 이적요의 욕망을 모방(지라르)하여 은교를 욕망하게 된 것.
결국 이적요처럼의 창작과 같은 예술적 영감의 에네르기를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기에
은교의 육체를 탐하게 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기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 작품 <은교>에 대한 질투가 은교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되어 빚어진 것으로 이 역시 인정받고자 하는 것.


4. 은교의 경우는 (남의 집에 허락없이 들어온 것,
고딩으로 출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물좋은(?) 식당을 이미 알고 있었던,
영화의 절정인 낮아지는 피아노 선율과 함께 지하서재로 내려가는 것,
첫경험으로 보기에는 의혹이 드는 장면으로 인하여 단순하게 순수로 규정지을 것은 아니고
요즘의 세태로 보면 아주 드문 열린 감성의 조숙한 인물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자
욕구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이상화한 스스로도 몰랐던 <은교>속의 자신에 대한 아름다움에의 발견자가
서지우인 줄 알고서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
그래서 "외로움때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마도 원작의 한계일 것이라 짐작할 뿐입니다,


그 "외로움"을 이유로 든 것은 서지우의 경우가 먼저이므로 감성이 열렸다 하더라도
이성이 깨인 것이 아닌 실수할 수 있는 나이인 은교로서는 자신의 인정에의 욕구를
달리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감성이 열렸다고 해서 어떤 책임을 질 이성적 판단의 담지자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경계인의 존재이기에. 해서 결국 이러한 인정에의 욕구로써의 서지우와의 정사가
가짜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으로 귀결된 것이니 영화 <시라노>와 흡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담을 넘어 열린 사다리가 소통의 도구였다면,
관객이라는 엿봄의 주체를 희화화한 그 서재로의 사다리는 살인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도구였습니다,
특히나 두번째 사다리는 은교와 서지우를 엿보는 이적요와 이를 관람하는 관객이라는
중층적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관음의 향유 주체는 결국 관객이니.....
나이를 드는 것이 좌절이 아니라 체념할 줄 아는 것이지 않을까요?


세월의 흘러감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
욕망의 부질없음을 몸 스스로 알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게됩니다.
영화를 보셨으면 원작을 한번 더 리딩을 해보시면 어디가 다른가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ㅎㅎ

 

어제 문득 잠이 오지 않아서 케이블을 틀다가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혹시 이 영화를 나와 같은 시간대 본 블러그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에 왜 잠을 안자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야행성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한때 나는 왕가위 매니아 였던 적이 있었다.
해피 투게더를 포함한 거의 전 영화를 몇 번이고 보곤 했었다.
그때마다 영화 후기라는걸 쓰기도하고 나름 자랑스럽게 이곳저곳에서 영화 감상평을

보고 장단점을 파악한 후 자랑스럽게 평론아닌 평론을 한 기억도있다.


후후~~ 지금 생각하며 참으로 조악한 삶을 살았던게 분명하다..

내 블러그 친구이신 쭈니님처럼 완전 영화 관련된 블러그를 만들 재주도 없으면서
지식을 난무하게 자랑하고팠던 젊은 시절의 다큐멘타리가 이제와서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왕가위가 영감을 얻었던 소설, 음악,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의 작품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실로 몇 년만인지 기억도 없지만 우연하게

잠못드는 밤에 나는 왕가위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당부분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꽤나 처음부분 부터 본거 같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게 된 왕가위의 작품은 처음에는 예전과 많이 달라진 듯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 단골로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은 친근감으로 다가왔고 곧 익숙해졌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4개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왕가위에 매료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나에게 그의 영화는
지난 나의 기억의 회고와 같다. 물론 나와 화면속의 주인공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당연히 그가 스쳐갔던 사람이나 사랑, 상처 등은 나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3가지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는 여러 모습들, 예컨데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없을 거 같은 공허한 맘을 가지고 다른 이성과 보내는 강렬한 여러 시간들이나
누군가 어려운 사랑을 순수하게 지켜보고 이를 도와주면서 느끼는 애틋한 마음,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다른 이성과의 짧은 만남 같은 것들은
누구나 직접 경험해 보았거나 하다못해 한번쯤은 맘속에서라도 품어봄직한 일들일 것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화양연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기존 왕가위 영화들을 토대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화양연화의 주인공이었던 양조위가 남자주인공 차우로 나오고 있으며 아비정전에서부터
왕가위 영화들의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쓰이는 수리첸(수리진)이 어떤 식으로든 등장한다.


그러나 계속하여 수리첸의 역할을 맡아왔던 장만옥은 왕가위와의 불화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대신 공리가 동명이인의 수리첸으로 등장한다. 동시에 중경삼림의 여주인공이었던 왕비-왕정문이
기무라 다쿠야와 함께 두 번째 사랑얘기와 차우가 쓰는 소설 2047의 주인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이었던 양조위, 왕정문, 유가령, 장첸이 출연하는 가운데 새롭게
장쯔이, 공리, 기무라 다쿠야 등이 등장하여 새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는 셈 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의미가 각자에게 다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지난날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긴 터널을 지난 온 거 같았다.


왕가위의 영화가 항상 어둡고 암울해 보이는 것은 우울의 극단에서 보이는

조그마한 희망의 여명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을 지나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왕가위의 세계가 미지의 미래공간으로까지
발전한다면 나의 세계는 세상의 끝에서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간을 지나 그녀를

대체하고자 발버둥 쳤던 순간적인 쾌락의 순간을 건너서 마침내 새롭게 희망을 보고자 했던

화양연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에 이른다.


나에게 화양연화의 순간은 언제였던가? 를 생각해본다.
블러그 친구들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라?
오랜시간이 흘러갔지만 너무나 짧았기에 아름다웠던 그런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그날의 강렬했던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웠던 누군가의 모습과 더 이상 뛰지 않기에 멈춘 줄 알았던
나의 가슴이 뛰던 그런 순간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소설 2047에서 일본인 남자 탁 (기무라 다쿠야)이
떠날 것을 부탁했던 안드로이드처럼 그 사람의 맘속에도 도저히 빼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결론적으로 왕가위의 영화들은 언제나 극단의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선택의 몫은 각자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최소한 화려한 캐스팅만큼은 안티팬들의

볼멘 목소리를 어느 정도는 잠재울 수 있을 거 같다.


동시에 그의 안티가 아니라면...
4개의 사랑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가 치유의 시간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맘속에도 강렬한 무언가가 있기에 항상 맘속에 다른 그 무엇이 있는

상대를 사랑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을 받아들 일수 없는 주인공을

설정해놓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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