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가인 ‘F.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발표한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이있다.
5년이 조금 넘은 걸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알바글을 한참 날릴때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놀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남들도 다읽고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마치 나도 이 소설은 늘 읽은것 같은
기분으로 살다가 뭐 읽을만한 얘기 거리 좀 써보라는 후배 닥달에 정작 읽지 않고 있던
위대한 갯츠비책을 알바 글 쓰면서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위대한 시작 위대한 겟츠비란 제목의 거창한 글을 읽다보니 생각이 엉뚱한데 미쳐
갯츠비 뒤집어보기 식의 글을 썼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 그 사이트에 들어 오던
사람들에게 호응을 많이 얻지는 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블러그에 새로운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를 않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매번 새로운 글을 쓴다는것이 전문 작가도 아닌데 버거운지라

내 글목록에 남아있는 상처뿐인 글을 홀라당 벗고 캡쳐해서 올려보려 한다.


하루키가 직접 번역한 이 작품은 한때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적이 있었다.
하루키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글을 쓰던 당시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든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거나,
양장본 하드커버로 재판이 나올정도로 인기가 있어 사람들 눈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이 소설이 꽤나 많이 읽혀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블러그 친구분들은 어떠신가?
나처럼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영화에 나오다보니 마치 읽은것처럼 환영이 어리고
내용도 다알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줄줄 말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니라구~~ 아님말구... 어쨋거나 각설하고...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향락이 넘치는 1920년대의 미국사회를 잘 표현한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실은 이 책 역시 고전문학 작품들처럼 ‘읽히지 않은 도서관’ 목록에 모셔져 있던 책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하루키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독서량이 워낙 많은 분들에 의해 일찍이 읽혀졌던 책이기도하다.


혹시 안본 사람들을 위해 작품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한 주인공의 옆집에 있는 대저택에서는 매주 엄청난
파티가 벌어진다. 그곳에서는 뉴욕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저택의 주인인 ‘개츠비’씨가 제공하는 향락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정작 파티의 주최자인 개츠비씨는 베일에 가려져있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흉흉한 소문들을 퍼트리고 떠들어대지만,
정작 진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실은 그의 부는 범죄를 통해서 축적된 것이다.


그리고 그 떠들썩한 파티는 자신이 사랑했으나,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는 ‘데이지’라는 여인을 찾기 위한 것이다.
개츠비는 결국 데이지를 만나지만, 그녀의 남편에 의해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가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려다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데이지의 남편의 귀띔을 받고 온 희생자
(이 사람은 데이지남편의 정부이기도 했다)의 남편에게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다.


주인공에 의해 치러진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그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주인공과 또 다른 한사람만이 쓸쓸하게 개츠비의 최후를 배웅한다.
 

난데없이 재미있는 글을 쓰라고 내게 종용했던 후배의 의견을 무시하고 문학 이야기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무언가’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통상적인 평에서, 개츠비는 순수하지 않은 시대에의해 파멸한 순수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결국에는 자신을 배신한 그녀의 몫의 죽음까지
감내한 이 사람을 일컬어, 작품의 저자는 아마도 일말의 의심 없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씨는 과연 위대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그는 ‘데이지’를 정말로 ‘사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Oh! My Dear 데이지...
데이지는 개츠비가 실현하고자하는 ‘이상’이다.
배금주의와 향락만이 넘쳐나는 미국에서, 개츠비는 ‘사랑’이라는 지고지순한
이상향을 실현시키기 위해 밀주를 만들고, 사기를 치고, 돈을 벌고, 거대한 저택에서
매일같이 파티를 한다.


개츠비가 하는 일들은 타락한 이들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정작 그는 쾌락에 휘말리지 않고 데이지라는 이상향을 향한 발걸음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개츠비의 낙원이자, 그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수이며,
그의 과거인 데이지는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멈춰있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세상이 여자에게 원하는 것을 알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고,
안락함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츠비의 데이지는 자신의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 소녀였지만,
지금의 데이지는 자신의 딸이 ‘예쁘고 귀여운 바보’이길 기원하는 여자다.
개츠비가 일생을 바쳐가며 꿈꿔온 데이지와 현실의 데이지를 과연 ‘같은’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실은 개츠비의 데이지는 현재의 데이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개츠비의 과거 속에서 멈춰있는 화석이며,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개츠비라는 인간의 존재이유를 위해서이다.
개츠비의 데이지는 숨쉬고, 변화하며, 존재하는 데이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데이지에게 투영된 개츠비 자신이다.


그가 변화한 데이지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떨쳐내지 못한 것,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자신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공표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그녀를 포기하는 것은 곧 그녀를 얻기 위해 바친
자신의 세월을 포기하는 것, 나아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하고싶다.
오히려 그의 세계 안에서 데이지는 움직이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는 ‘객체’이며, ‘타자’일뿐, 개츠비의 사랑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순간 바로 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데이지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고통을, 사랑을 가지고 숨을 쉬며 변화해가는 ‘존재’다.
개츠비가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화려한 파티도, 범죄도, 황량한 종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으려 했고,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인 데이지는 더 이상
개츠비가 만들어 놓은 퍼즐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
항상 이렇게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개츠비씨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곤 한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 혹은 그에 대한 느낌은 때때로
분노와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체 그 자리를 정하는 사람은 누굴까?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그 사람에 대한 분노는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


인간은 그것이 나를 배신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의 발로일 뿐이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종의 원칙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 ‘존재하는 것들’의 의사를 물어보거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었을까? 침묵과 동의는 분명히 다르다.
오로지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 아니 인간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자기 편한대로 정해버린 자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걸까?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인간 vs 비인간의 영역에서만 등장하는 문제들이 아니다.
자식의 자리, 부모의 자리, 여성의 자리, 가난한 자의 자리...
인간사이의 관계에서도 ‘그가 있어야할 곳’에 대한 기준은 엄정하다. 
나 혹은 사회는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단지 ‘거기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라벨이 붙어있는 서랍 속에 차곡차곡 분류해낸다.
서랍 속에는 단지 ‘분류된 것’들이 존재할 뿐, 인간은 없다.


대체 내가 보고 있는 저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에 앞서서 나는 ‘무엇’을 통해 보고 있는 걸까?
나의 눈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정해놓은 어떤 이의 눈인가?

 
제2의 성...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타자성의 내면화를 통해
‘여성’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통해 게츠비씨의 시선은
이제 데이지의 내부에 자리한다. 두 개의 시선이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남자의 눈을 정상 혹은 기준으로 설정해놓은 사회의 시선하나,
그리고 그녀의 내면에서 사회의 기준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외로운 시선 하나. 여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마저도 타자의 시선을 적용한다.


거울을 보며 ‘완성’시키는 그녀들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똑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길을 걸어도,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집요하게
추적한다. 어쩌면 이 사회가 제공하는 선택은 꽤나 극단적이다.


타자성을 받아들이거나, ‘이상한 년’이 되거나, 아니면 그 경계에서 고뇌하거나.
남성들의 문화 속에서 여성은, 정복의 대상이거나, 회귀하고 싶은 자궁이거나,
'비밀스러운 무엇이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여성은 그저 돈 주고 사먹는 ‘보지다.라는
사고를 가진 정말 우스꽝스런 남자들도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들이 딱히 그 사람들의 현재나 미래에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예전에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발견한 한 기사에서는 기혼여성을 상대로 한
성매매찬반 설문조사가 있었고, 그 도표위에 노란머리의 성판매여성이 성매매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언니’들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고 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어느 ‘비뇨기과’의 제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희귀한’조합은 아무리 봐도 성 판매여성들의 권익과 인권을 위해서 힘쓰는
어느 비뇨기과원장님의 고군분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희귀한 모습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꽤나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다.
타인의 얼굴 인간들은 굳건한 자아를 얻음과 동시에 도무지 무너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벽도 동시에 만들었다. 그 벽은 다른 이들을 타자로 만들고, 지배함으로서 더더욱 굳건해진다.


이 타자들은 오로지 주체의 완전무결함을 입증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것 들일뿐,
전혀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지난 세월동안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말하라는 개츠비에게,
오직 한순간 일지라도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해, 실은 잃어버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데이지는 하나의 주체로서 ‘살고’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배신’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으며, 그 결과까지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제멋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오로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았으며,
그것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츠비보다도 더욱더 주체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중년들이 즐겨듣던
심수봉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노랫말이 생각난다.


언젠가 말했듯이 노예제의 역설은 결국 그 주인이 노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망각 한 채, 누군가를 객체로, 타자로 놓아두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그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마저도 너무나 낯선 타자로, 객체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결국 소통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
너무나도 낮선 타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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