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사백 페이지쯤을 넘기면서 벌써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마라톤 주자가 골인 지점을 바라보고 느끼는 그런 달뜬 기분이리라.
나는 지난 몇 달간 읽다가 집어던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이 지루한

소설을 한 문장도 건너뛰지 않고 모조리 읽어낸 것에 스스로 박수를

보낼 준비가  진작부터 되어있었다. ‘양약고구良藥苦口’라는 말을

소설 한 권 읽는 데도 상기해야한다는 게 실로 대단한 일이다.

역시 작가의 힘은 명성에 있는게 아닌가싶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혹은 만화로 바꿀 목적에서
씌어질 수 있는 것에 달려들고 있네.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오직 소설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개작되었건 각색에서는
비본질적인 것만 남게 되기 때문이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서

그것을 이야기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네. (p.301)


위의 인용문이 작가의 서문이 아니라 본문의 대화문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이는 이 책을 완독을 보지 못하고 진즉에 멀리 던져버렸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 안에서 그 소설에 대한 평론까지 겸하고 있는 이 기묘한 설정은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뻔뻔하게 대화하는 상황 앞에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것이 돼버린다. 절대 각색할 수 없는 소설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상업적 이익을 탐하는) 그 누구도 각색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악착 같이 읽게 한 것은 어디에서 나온 힘일까.
딜레탕티즘, 바로 지적유희이다. 이 방면에서 쿤데라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가는 흔치 않을 듯 하다. 끊임없이 질문과 사유와 대답을 반복하는 이 놀이는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면서도 그 엄정한 학문의 태도에서는 벗어나있다.


예술이라는 면책특권을 휘두르고 있으니 쿤데라의 어떤 궤변도 그럴 듯 해보이기

쉽상이고, 또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내뱉어놓은

말들 끼리 서로 쥐어뜯고 할퀴어서 나중에 쓸만한 말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점.
이 책에서도 깊이 느끼는 바이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 많은 오탈자를 품고 있는

단행본은 진실로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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