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은,
욕망을 덜어내는 것 그리고 진실을 바로 보는 것, 대상을 넓고 깊게 살피는 것,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일상에서 우리는 언어로 표현하려는 모든 것을 다 표현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비유를 들기도 하고, 사례를 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것이 이해되는 차원에서는 함께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소통과 교분이 단절되고, 몰이해와 오해도 겪게 되는 것이
항용 있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 안에 갇혀 있어서,
자신의 세계가 가장 완전하고 편안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자기 세계 속에 있는 언어가 아니면 관심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설혹 듣더라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자기도취가 자신과 다르거나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려 들고,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만이
옳다고 고수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참으로 소통의 원활하지 않음에 대해 힘겨워한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남의 속내는 꿰뚫지 못하여 안달하기도 한다.
믿고 간과 쓸개를 보여주면, 어느새 냉큼 뒤집어 놓고는 의기양양하게
도끼자루를 들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주 웃기는 짬뽕이 되는 경우다.


앞에서는 웃음 짓지만 뒤에 감추어진 음험함을 측량할 길이 없기도 한다.
정글이라고나 할까?. 정글의 법칙-­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처절한 곳에서
우리는 싸우고 있다. 뒤돌아보고 곁을 보면 맹수들과 독충(毒蟲)과 독초(毒草)와
늪지가 감추어진 밀림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 도시는 밀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밀림안에 사람들은 저마다 '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고립되어 있는 '섬'들...
그'섬'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망(網)'­(이메일, 핸드폰 등) 은 광범위하게 덧놓여 있다.
수많은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는 '망'들 사이에서 스스로가 '섬'이 아니기를 어쩌면
스스로 '섬'이 아닌척하는  갈망하는 목소리들로 그 밀림을 가득 채운다.


그 목소리들이 밀림 곳곳에 숨어 있는 맹수와 독충과 독소와 늪지들에 대한 판단을 덮어버린다.
차를 타면 목적지까지 이르는 동안 그 목소리들을 들어야 하고.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에서부터
낯뜨거운 이야기, 욕설과 상말로 범벅이 된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등등,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들어야 한다.


상황을 되돌아보자..
사람들은 자신을 말할 때 자기 자신의 성격이나 학벌, 외모, 직장 등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또 자신이 그 누구와 관계맺고 있는지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알게모르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부풀리기위해 혹은 자신이 잘나간다는 것을 보이기위해(?) 사회의 저명인사 또는
소위 기름끼 자르르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에대해 복어 배 부풀리듯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이런 이면에는 자신의 사회적 불리함이나 조금은 열등감 때문에
"나는 누구와 친구야, 내 삼촌이 의사야.. 등등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몇가지 위장을 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일종의 자기과시일 듯도 싶고,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지 싶기도 한다.
짜증이 날 정도로 '남'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는­- 스스로가 고립된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키는
이런 의식 속에 나도 사실은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말'이 흐르지 않음으로써 '말'이 흐르는 그 기묘한 역설을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머리에 햄머를 맞은듯 충격적으로 가슴 뭉클하게 소통의 장을 만들어낸 영화로 기억을 한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묵묵히 감내하고 포용하면서 결국 손자와 소통하게 되는 할머니,
마침내 할머니의 가슴속에 담겨지는 손자의 이야기, <집으로…>는 한 편의 동화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동화는 포근하고 아름답다. <집으로..>라는 동화는 군더더기 없고 맑아서 가슴속에
파장을 일으켜 눈물짓게 한다. 우리 시대는 동화가 사라진 시대가 아닌가싶다.
할머니 또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동화를 듣던 시대에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소통이
원활했다고 생각을한다. 그 때에는 '정'으로 묶인 '말'이 존재했지만, 이제 우리들은
그것을 잃고 고통스러워 하는것은 아닌지 생각해볼일이다.


할머니처럼 허물어서, 낮추어서, 감싸안으면서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나를 허무는 방법을 모르고. 낮추는 방법도 모른다.
감싸안는 방법도 모른다. 아니, 다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것이다.


아집일까. 독선일까?  할머니의 느릿느릿한 걸음은 손자의 도발적인 발길과
질풍 같은 걸음을 감싸 안는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는 회전속도를  측량할 길 없지만,
그 소용돌이의 바깥에서는 맴돌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느슨함이 있다.
어둠이 내려안는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오고 이제 나도 '집으로' 가야겠다.

 

'추억속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천하고픈 프랑스식당..  (0) 2012.07.10
정교함과 자연스러움...  (0) 2012.07.06
그 어느날 봄...  (0) 2012.04.14
마음의 편린..  (0) 2012.03.30
이 봄 행복해지는 팁하나..  (0) 2012.03.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