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 책을 읽으셨나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나는데 블러그를 접고 이 몇칠 공백을 메꾸려 무진기행을 읽었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총 5권짜리 김승옥 전집 중 1권이다.


수록된 단편 중 대개는 예전에 한번씩 읽어본 적이 있는 것이었으나,
재독할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숨을 죽이고 찬찬히 읽었다.
우선 서문에서 놀랐다.

스리마드 바가바탐 의 서문 이후 내가 읽어본 가장 종교적인 서문이었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잘도 견뎌왔군!
작품 한편 한편을 들춰볼 때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입술이 바싹 말라붙은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눈에 선해지며 저절로 연민 섞인 감탄사가 중얼거려진다. (p.8)"라는
신앙고백을 자신의 빛나는 작품집의 서문에 올리는 이가 과연 진짜 김승옥이 맞나 싶었다.


작품으로 만나왔던 김승옥과는 전혀 이질적인 낯선 말법에,
그것이 마치 동지의 전향서인 냥 일종의 배신감이 엄습했다.
차라리 김지하의 ‘밥이 한울님이라’는 소리는 거슬리지 않는데,
김승옥은 왜 하필 하나님이란 말인가.
" 인간의 고통의 궤적을 쫓아서만 하나님의 사랑 깊은 손길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분명한 것이다"(p.9)
이글을 접하니 그저 톨스토이가 생각났다.


사백쪽 남짓의 이 책 안에는 좋은 문장이 흘러넘친다.
이야기의 구성도 비범하다.
그러니 종교에 귀의하며 절필한 천재가 아쉬울 따름이다.
나머지 네 권도 속히 읽어모아서 전집을 소장하고 싶다. 


생명연습(生命演習)

: 노교수의 첫사랑, 어머니를 살해하자 공모하는 형제.


건(乾)

: 빨갱이의 시체를 보러가자. 윤희 누나를 윤간하려는 형들과 무언의 동의. 앙팡테러블.


역사(力士)

: “그는 중국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사이에서 난 혼혈아였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중국에서 이름 있는 역사들이었다.
   족보를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수가 있다고 했다.
   그네들이 가졌던 힘,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고 유일한 유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무형의 재산은 가보로서 후손에게 전해졌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영광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서씨에 와서도 그 힘이 재산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그 힘은 서씨로 하여금 공사장에서 남보다 약간 더 많은 보수를
   받게 하는 기능밖에 가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서씨는 그 약간 더 많은 보수를 거절하기로 했다.
   남만큼만 벽돌을 날랐고 남만큼만 땅을 팠다. 선조의 영광은 그렇게 하여 보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씨는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한밤중을 택하고 동대문의 성벽에서
   그 힘이 유지되고 있음을 명부의 선조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p. 104)”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 글쟁이에 대한 자기혐오가 통렬하다.
  “하룻밤 벌어서 열흘을 살 수 있다면 오오, 세상 어디에 가난뱅이가 있겠는가?”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 프라이드가 아니였을까?


싸게 사들이기

: 곰보주인을 피해 헌책방 구석에서 책장을 찢어 감추는 학생. 


무진기행

: 안개 속 무진은 도피처이자, 휴식의 공간인데,
  그곳에서 마저 도망치듯 나와야하는 인생.


차나 한잔

: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p. 257)


   연재가 중단된 만화가의 일일.
   신경성 설사도, 도시의 두루뭉술한 어법도, 어린 약사의 흉터도,
   유쾌한 안해의 웃음도. 불안한 미래 앞에서 모두가 비애구나.

 

서울 1964 겨울
 

들놀이

: 직장인 콩트.


염소는 힘이 세다

: "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야행(夜行)

: 페미니스트들에게 혼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완력에 대한 동경,
  스톡홀름신드롬.


그와 나

: 반어로 해석해야 옳은가.
  거대담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로 봐야하는가?.


서울 달빛 0章

: 서문에서 밝힌 저작 과정이 흥미롭다.
  완성된 단편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한다.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 “ 벗들이 전지(田紙)를 가지고 통장(通帳)을 가지고 번영(繁榮)할 때,
    영웅은 사장(砂場)을 피로써 물들이고 거꾸러진다.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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