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 그리고 현실

 

굳이 장주(莊周)의 나비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실과 꿈의 혼동,
그리고 이 둘의 상호 영향관계는 늘 익숙하다.
아무 말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연인의 모습을 꿈에서 본 후,
헤어지자는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었던 기억과
어머니의 뒤숭숭한 몽조에 걱정 끼칠까 싶어 약속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리고 며칠 전, 어깨에 기대어 흘린
사랑했던 그녀의 눈물 세 방울. 그 빛나던 세 방울이 옷으로 스미지 않고
동그랗게 맺혀있지 않았다면 꿈이 아니라 기억 됐을지도 모르는 미련한 마음.   
 

2. 공간


소설의 주인공 ‘나’ 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의 끝’이라는 도시와
‘나’의 실재 삶의 공간인 원더랜드. 이 두 세계는 마치 꿈과 현실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서로에게 간섭하는 평형한 세계이다.


그리고 이 평형한 세계를 넘나드는 매개인 일각수.
일각수에 대한 신화적 상징은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서술하지만,
그저 환상성을 증대시키는 소품으로 이해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소품의 기능과 일각수의 신화원형적 기능과의
거리가 다소 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의 빛나는 능력은 ‘원더랜드’의 모습을 기묘한 세계로 묘사한 점이다.
세계의 단순화로 볼 수도 있을 ‘세계의 끝’보다 어쩌면 더 이상한 ‘원더랜드’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이 병행하는 두 세계의 이야기가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시간 
 

시간의 문제. 병치하고 있는 두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번갈아가며 각 세계를 서술하고 있으니, 동시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이 잠들어버린 이후, ‘세계의 끝’에서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기도 하다.


물론 내용상 역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원더랜드'에서 잠들어 버린 시점이 '세계의 끝'의 구덩이 앞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시점인지 혹은 '세계의 끝'에 입성하는 시점인지 쉽게 알 수 없다.
두가지 가정을 열린 구조로 내버려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백과사전 막대기’를 설명하는 노박사의 말을 빌어 넘어가기로 했다.


사념에는 시간이란 게 없네, 그게 사념과 꿈의 차이점이지.
사념이란 한 순간에도 모든 걸 볼 수가 있지 영원을 체험할 수도 있어
폐쇄 회로를 설정해 놓고 그 곳을 계속해서 빙빙 돌 수도 있네.
그건 게 사념일세. 꿈처럼 중단되는 일은 없지.
그건 백과사전 막대기와 비슷하네. (2권 p.157)」 

 

4. 죽음


하루키는 결말을 두고 대단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할 것인가?
(전작인 중편『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그림자와 함께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의 결말처럼 그림자와 분리되어 그녀와 함께 숲으로 떠날 것인가?
나는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한 쪽의 결말을 상상해보았다.

 

하루키 역시 이를 고려했기 때문에 ‘인체냉동’과 ‘노박사의 피신’을 설정한 것이리라.
그랬다면 하드보일드하긴 하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상상은 독자의 소유이고, 결말은 작가의 것이다.


결국 저자는 그림자와의 분리를 선택했고 나는 이를 ‘나’의 죽음이라고 이해했다.
세계의 종말보다 늘 먼저 찾아왔던 개인의 종말, 바로 죽음인 것이다.
사념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라니 사념 속에서는 자아가 영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사과가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 세계의 마음을 버리고 평정심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세계는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5.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것은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관념과 실존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탄한 작품 안에서 관념과 서사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들고 있는 저자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늘 그렇듯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관념을 늘어놓다가도 성(sex)에 대한 이야기를 양념치듯 섞는

- 마치 어느 명강사의 졸음방지 교수법처럼- 하루키의 방식에도 웃으며 박수를 보낸다.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가 된 예는 긍정하지만 이 작품을 ‘일각수의 꿈’이라

칭하는 것에는 별로 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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