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두시간만에 마쳤는데, 의미를 생각하려니 서너 시간도 넘게 걸린다.
이게 무슨 시집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본래 없는 것을 찾으려면 고단한 법이다.


온갖 군데에 ‘프레임' (frame)이라는 개념을 붙여놓으니,
진실로 프레임이라 느껴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앞의 여섯 장은 다른 이의 연구사례를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고
(중간에 외국책을 읽고 있는 줄로 착각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인 7장은  ‘밝고 착하게 살자’ 라는 말인데,
새로운 프레임을 10가지나 제시했다. (뱃속에 가스가 찬다.) 
이런 부실한 책들이 쏟아져나오는 까닭은 세상이 부끄러움을 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은 만원이다. 읽던 도중에 책값이 아까워서 도서관에서
빌린 책 보듯 깨끗하게 보았다. 오며가며 재밌는 가십거리로 읽을 만은 하다

 

 

 

카톡왔슈!!!!
아주 귀엽고 명랑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어느날 나를 반기며
다음과 같은 문자가왔다. 내가 가입해있는 카페에 작은 소모임 독서토론회,
어떤 모임인지 한번도 가보지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익사이팅할 것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내 지식의 전투적 무장때문일까?


이번 모임에 책 토론 제목은 콘라드 로렌츠의 솔로몬왕의 반지 입니다,
책을 읽으셔도 좋고 안읽으셔도 좋습니다. 바로 인터넷 서점으로 고고씽...
책을 사려고 보는데.. 헉~~ 이건 뭐얌???


Yes 24, 알라딘서적, 간디서원(크레파스),
서적마다 책정보를 올려놨는데보니 목차들이 다 틀린다.
김정수씨가 번역한 것과 김천혜씨가 번역한 것은 완전 다르다.


어떤것을 사야 하는 것일까? 첫번째부터 사람을 갈등케한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싼게 비지떡이라 했던가?
책은 좀 돈을 드려도 괜찮겠다싶고 서문을 읽어보니 흠.. 아마도
독서 토론회에서 원하는 것이 이책이 아닐까싶어 구입을 했다.


서론이 길었다.
콘라드 로렌츠의 솔로몬왕의 반지라는 제목이 주는 첫 정서는 성서적 이미지나 혹은
어린이 위인전같은 느낌이였다고나 할까?  왜 솔로몬 왕의 반지라고 제목을 지었을까?
내가 아는 솔로몬의 반지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니..하는 자제와 절망에관한 용기의 반지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 옛날 솔로몬왕이 끼고있는 반지를 돌리면 동물의들의 말을
이해할 수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책제목을 가져왔다 하니 생각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어쩐지 좀 가벼워보인다 싶었고 흥미위주의 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첫장을 펼친 이후 친근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이되어 나무랄때없는 훌륭한 책이라
생각이든다, 특히  에세이 형식을 띠고있어 이 책의 매력을 꼽으라하면 구수하고 훈훈한
매력과 유려한 문체는  파브르 곤총기를 능가하는 것 같다,

 
또한 곳곳마다 저자 로렌츠의 숨은 공들과 흔적들이 배어있고 노력들이 비틀거리며 살고있는
내게는 무엇보다 글을 읽으며 미안감이 앞섰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현빈 주연의 한땀한땀
수놓은 트레이닝 명품옷을 보는 것과 느낌이 다르지 않았다고하면 비유가될까?


무엇보다 로렌츠가 동물들에게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관찰한 것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고 원인과 결과를 이끌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경이로움도 느낄수 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의 한 種이라 분류하고 동물중에 영장이라 불리운다,


그렇다면 이 동물의 세계를 통해 우리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를 분류하는 지점은 어디부터일까?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간극은 무엇일까?  읽는내내 동물들과 인간이 가지고있는
구조와 삶의 행태가 그리 달라보이지않음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이책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해본다.
동물의 언어적, 사회적, 도덕적 특성이 인간 생태와 유사점을 띤다는 사실...
다른 과학이론과는 달리 동물 행동이론 들이 귀납적이과 조금은 가변적이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신선하고 애쓴 흔적들로인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삶과 행태, 인간의 존재가 만류영장이라 하지만 우주속에
숨겨진 밀알처럼 작아지는 모습을 보며 나자신조차 측은해지고 말았다. 
이 동물들의 삶을통해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인간들에게 로렌츠는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지
한번더 뒤돌아 볼 귀한 책이 아닌가싶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공존... 하지만 그 안에서의 지혜로운 동물의 삶,
하찮게 생각했던 동물의 세계가 어쩌면 그렇게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완벽하고 조화롭게
이뤄지는지 그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는 측면에서 또 하나의 배움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싶다,


무엇보다 콘라트 로렌츠는 비교 행동학 분야의 일인자로서 앞으로도 동물 사랑의 저변확대에
크나큰 기여를 할 인물로 손꼽고싶다, 한번쯤 일독을 권하고싶다 우리 저변에 확대되고있는
반려동물과 야생동물에 대한 사랑이 이 책을 통해 더 커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든다,

 

 

이 책은 흠앙해 마지 않는 다산 선생의 서간문을 엮은 책이다.
책의 내용 중에 다수는 영정조대 지식인들을 소개한 여타 다른 책들과
겹치는 것이 상당 부분 있었으나, 선생의 권면이야, 다시 듣고 또 들어야 할 금과옥조이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주목한 점은 편지글에 나타난 선생의 인품이다.
이 책의 대분류는 아비로서의 다산, 동생으로서의 다산,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다산을 살펴볼 수 있도록 엮어놓았다.


머나먼 유배지에서도 두 아들의 면학열을 북돋우고, 행실을 점검하는

짐짓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 형제가 각각 유배지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의 연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는 모습,
(둘째형 현산의 건강을 염려해 산개(山犬) 를 잡는 방법에서부터 요리과정까지
상세히 적은 편지는 선생의 자상함과 형제애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학문과 문장에 대한 견해를 필역하는 모습,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번 독서를 통해, 선생의 서간문에 나타난 여러 말씀 중, 한가지를 받았다. 아래에 적는다.
 
태사공이 말하길, 늘 가난하고 천하면서 인의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1. 꿈 그리고 현실

 

굳이 장주(莊周)의 나비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실과 꿈의 혼동,
그리고 이 둘의 상호 영향관계는 늘 익숙하다.
아무 말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연인의 모습을 꿈에서 본 후,
헤어지자는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었던 기억과
어머니의 뒤숭숭한 몽조에 걱정 끼칠까 싶어 약속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리고 며칠 전, 어깨에 기대어 흘린
사랑했던 그녀의 눈물 세 방울. 그 빛나던 세 방울이 옷으로 스미지 않고
동그랗게 맺혀있지 않았다면 꿈이 아니라 기억 됐을지도 모르는 미련한 마음.   
 

2. 공간


소설의 주인공 ‘나’ 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의 끝’이라는 도시와
‘나’의 실재 삶의 공간인 원더랜드. 이 두 세계는 마치 꿈과 현실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서로에게 간섭하는 평형한 세계이다.


그리고 이 평형한 세계를 넘나드는 매개인 일각수.
일각수에 대한 신화적 상징은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서술하지만,
그저 환상성을 증대시키는 소품으로 이해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소품의 기능과 일각수의 신화원형적 기능과의
거리가 다소 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의 빛나는 능력은 ‘원더랜드’의 모습을 기묘한 세계로 묘사한 점이다.
세계의 단순화로 볼 수도 있을 ‘세계의 끝’보다 어쩌면 더 이상한 ‘원더랜드’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이 병행하는 두 세계의 이야기가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시간 
 

시간의 문제. 병치하고 있는 두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번갈아가며 각 세계를 서술하고 있으니, 동시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이 잠들어버린 이후, ‘세계의 끝’에서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기도 하다.


물론 내용상 역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원더랜드'에서 잠들어 버린 시점이 '세계의 끝'의 구덩이 앞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시점인지 혹은 '세계의 끝'에 입성하는 시점인지 쉽게 알 수 없다.
두가지 가정을 열린 구조로 내버려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백과사전 막대기’를 설명하는 노박사의 말을 빌어 넘어가기로 했다.


사념에는 시간이란 게 없네, 그게 사념과 꿈의 차이점이지.
사념이란 한 순간에도 모든 걸 볼 수가 있지 영원을 체험할 수도 있어
폐쇄 회로를 설정해 놓고 그 곳을 계속해서 빙빙 돌 수도 있네.
그건 게 사념일세. 꿈처럼 중단되는 일은 없지.
그건 백과사전 막대기와 비슷하네. (2권 p.157)」 

 

4. 죽음


하루키는 결말을 두고 대단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할 것인가?
(전작인 중편『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그림자와 함께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의 결말처럼 그림자와 분리되어 그녀와 함께 숲으로 떠날 것인가?
나는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한 쪽의 결말을 상상해보았다.

 

하루키 역시 이를 고려했기 때문에 ‘인체냉동’과 ‘노박사의 피신’을 설정한 것이리라.
그랬다면 하드보일드하긴 하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상상은 독자의 소유이고, 결말은 작가의 것이다.


결국 저자는 그림자와의 분리를 선택했고 나는 이를 ‘나’의 죽음이라고 이해했다.
세계의 종말보다 늘 먼저 찾아왔던 개인의 종말, 바로 죽음인 것이다.
사념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라니 사념 속에서는 자아가 영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사과가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 세계의 마음을 버리고 평정심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세계는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5.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것은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관념과 실존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탄한 작품 안에서 관념과 서사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들고 있는 저자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늘 그렇듯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관념을 늘어놓다가도 성(sex)에 대한 이야기를 양념치듯 섞는

- 마치 어느 명강사의 졸음방지 교수법처럼- 하루키의 방식에도 웃으며 박수를 보낸다.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가 된 예는 긍정하지만 이 작품을 ‘일각수의 꿈’이라

칭하는 것에는 별로 찬성할 수 없다.

 

‘조직론으로 본 한국 기업의 본질적 위기와 그 해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전작인『88만원세대』의 뒤를 잇는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제 2권이다.

 
전편이 정확히 내 삶의 현지점을 논하고 있는 반면,
기업 조직의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경한 경제학 이론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도 원활한 독서를 막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쉽게 쓰려는 저자의 노력이 있었으니, 그나마 완독할 수 있었으리라.


이 책에서 얻은 정보들과는 별도로, 저자가 전편에서부터 말하는 바와 같이,
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하고도 이 땅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혁명에 대한 상상력이 소멸되는 것은 - 그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
그 자체로 희망 없는 비극이다. ‘혁명은 민주주의를 부르지만,
배고파서 벌어지는 폭동은 파시즘을 부르게 된다.(p.278)’라는 말 또한 일면 타당한 듯하지만,

배고파서 벌어지는(그것이 캐비어를 먹기 위한 것일지라도) 폭동과 공모하지 않은

혁명이 과연 역사상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은 피할 수 없다.


이 책은 ‘조직론은 어렵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조직 모델이 더 건강한 것인지에 대해 저자 역시 확답을 피하고 있다.
그나마 마지막 4장(한국기업에게 던지는 조직론의 질문 5가지) 정도에서 희미하게

저자의 의견을 읽을 수 있었다.


현재의 마초 조직을 극복하고 20대와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88만원 세대),
영어만 잘하는 획일적인 귀공자들만을 모이는 현재의 인재선발 구조로는
포스트 포디즘(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에 적합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인재를 뽑기 어렵다는 것,
지역과 기업이 공생하는 관계로 나아가야한다는 것,
노동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볼보주의를 고려해야한다는 것이 그러하다.
이 한권의 책을 모두 읽기 어렵다면, 4장만 보아도 내용의 거개는 파악할 수 있을 듯 하다.


내게 사회를 보는 안목을 넓혀준 독서였지만,
현재의 나로선, 내 안의 마초를 극복해야겠다는 교훈 정도가 유익하다. 실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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