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내 책상 앞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잘 모르는 투박한 거울 하나가 있다
집에서 가져다 놓지도 그렇다고 돈을 주고 내 얼굴을 쳐다보겠노라고 산적도 없는데
그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내 외모에 신경을 쓰라고 일부러 가져다 놓았던 것
같은데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이 거울이 어디서 났는지 누가 줬는지 생각도 못한 체
여러 해 나를 지키고 있다.


이 거울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를 매번 잊고 사는 건 아닐까?
내 육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거울은 부지런하게 드려다 보지만 정작 마음의 거울은
잊어버리고 들여다 보지 않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요즘 딸아이가 사준 자기개발서 책을 오랜 시간을 두고 읽었다.
사실 자기 개발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권력이 대중들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과거에 권력은 총과 칼로 대중들을 통제해 왔지만 근대 이후에서는 이른바 푸코가 얘기하는

파놉티콘처럼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는 기술들을 만들어왔다.


왜 우리는 굳이 '아침 형 인간'이 되어야 하고,
왜 우리는 굳이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강박적으로 해야 하며,
왜 우리는 사회생활을 위해 무수한 처세들을 따라야 할까?.
또 굳이 왜 그렇게 꿈을 강박적으로 가져야만 할까?.
꿈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것에 강박을 갖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도르노가 이미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명저를 통해 얘기했듯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통제해왔지만,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 자신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또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되고 조직화되는 비인간화를 꼬집었던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자기 개발이라는 책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고

실제로 말만 뻔지르르 한 책들이 너무 많아  신뢰감이 없다보니 잘 안읽게 되는게 사실이다.

 

그래도 딸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한 것은 내가 사업을 제대로 못하고 돈을 못벌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이런 책이라도 읽어보고 마음 다잡아 사업에 집중하라 사준 듯 하다.ㅋㅋ

성의가 괘씸하기도하고 한번쯤 독서를 통해 내가 개발해야 하는 것은 무얼까 생각도 들었다.


딸이 사준 책의 제목이 돈을 벌기보다는 운을 벌어야 한다는 책이다.
이 책은 사람의 사주 팔자를 근거로 운이 따라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대한민국 1%의 비밀은 바로 운 경영이라고 할 만큼 좋은 운을 끌어 당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살다 보면 타고난 운명 때문에 벌어지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또한 운명도 다 똑 같은 운명이 아니 어서, 인생의 영향을 미치는 힘이 강한 것이
있고 약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모를 때 타고난 운명대로
살게 되는데 이것을 바꾸는 것이 바로 이 책 안에 있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두려워할 것 중 첫 번째가 바로 운명이라고 말했다.
인생이 어쩔 수 없이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책을 통해 아주 간단한 운을 버는 방법을 배웠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이 운을 잘 경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고귀하게 행동 하는가? 나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는 강한 사람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나를 개발하다 보면 운의 흐름이 나에게로 온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것을 학문적으로 집대성 한 것이 바로 주역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은 마음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심리학자들은 인간 행동에 숨어있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밝혀낸다. 한편 주역은 마음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아주 흥미로운 체계적 연구라 읽으면서 내내 생각을 했다.


맞는 말이다.
무엇 하나 우연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문제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뜻을 감추고 있다
융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상징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느라 다른 책들을 좀 소홀했다


당장 이번 주 독서모임 책도 읽어내야 한다.
이번 주는 조금 바쁘다 바빠가 될 것 같다
 

 

 

 

내가 몸닫고 있는 독서카페의 발제 책이여서 읽기는 읽었지만 솔직히 리포트나

연구 문헌 자료로서 가치를 지녔다면 몰라도 이 책을 독서목록에 포함시키기에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너무도 많이 들어 책을 한동안 안보고 방치해둔 적이 있다.
책의 근원이 통속적이지 않고 학구적이다라는 기본 개념을 가져야 읽어볼 만한 책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마구마구 화가 날만한 책이라 생각이 든다,


고든팻쪄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에게 문명보다 앞서는 것이 외모 가꾸기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외모 가꾸기가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행위라면 그것 자체가 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기저는 뛰어난 외모를 지닌 사람은 상대적으로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보다
사랑 받고 더 많은 기회를 부여 받았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범죄자도 외모가 뛰어나면
동정심을 얻는 그런 우스꽝스런 입장이 되기도 한다.


한때 KAL기 폭파범인 김현희가 체포되어 국내에 입국을 할때 공항에서의 그녀 모습에
남자들의 동정 감이나 비호하려는 세력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 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을
반증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외모를 부추기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에서 비지니스화되어
부를 축적하는 하나의 모티브가 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패션, 뷰티화장품, 성형수술의 시장은 기하급수적 매출을 보이고 있다.
성형 수술의 경우는 고등학생이 되면 외모개선을 위하여 방학 때 성형외과에 줄을 설 정도가 되어지니
아름다운 외모가 삶을 아름답고 자신 있게 살수 있는 분명한 모티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모의 비교 경쟁 때문에 상대적 부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이나 열등감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누구나가 다 동조를 한다면 인류 유전자 형성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어지는 게 요즘 현실세태이다.


그래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다른 견해나 주장 혹은 합목적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생긴 외모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인지?  외모에 대한 기준은 시대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많은 차이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특히 동양적 미인과 서양적 미인은 분명 차별적 인식이 다르다,


과거 중세시대에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아주 통통한 여자이다.
비너스의 자태를 봐도 아랫배가 적당히 나오고 통통한 여인의 모습이 그 시대의 미의
기준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현대는 완전 비쩍 마른 여자가 아름답고 날씬하다고 평가를 한다 

이는 어떤 사고나 취향의 차이가 그 시대적 배경 안에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문제는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이성 선택에 있어서 큰 기준이 된다는 데에 문제가 발생된다
여자든 남자든 외모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그 외모를 무척이나 따지는 사람 중에 하나이니 할말은 없다. 쩝~~ -..-;;;


그런데 외모가 중요하다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그 외모 지상주의는 단순히 외모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비하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못생긴 외모의 문제를 당사자 본인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외모를 비하하는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 합리화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수 만금을 들여서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하고 얼굴 성형을 해야 하고 예쁘고 날씬한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각으로 당연시되는 현대의 모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것을 조장하는 것 역시 남자들의 지배적 의식이 한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지배적 의식 뒤에는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망상이나 착각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것인데 어떤 미의 기준을 만들어 형상화시켜 그 규격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미디어의 횡포이거나
환상적 산물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미 적 기준에는 권력이 심하게 개입이 되기도 하는데 그 권력이 바로 금 권력이
바로 돈의 경제로 불려지며 숨을 쉬기도 한다 어쩌면 산업 활성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미의 기준을 만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환상을 쫓아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얼마 전 무한 도전이라는 버라이어티에서 못.친.소라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난 이것을 보면서 외모 지상주의가 주는 자극적 도발 극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을 해봤다.
당혹스러운 것은 흥미롭게도 노골적으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지적 질을 한 예능이 아니었나 싶다
외모라는 기준 틀이 애매모호한 상황에 못생긴 친구라는 극단적 기준은 결과적으로 외모 지상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안 할 수 없게 만든 프로그램이라 생각을 한다


고든팻쪄의 주장은 외모가 중요하기는 한데 그 외모를 바라보는 현명한 자세와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역설을 한다. 자신만이 가지는 자존 감을 획득하여 용감하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항하고 맞서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맞서봐야 현재의 트랜드가 비 호감 외모주의자들의 푸념이나 한서린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남들보다 우월한 외모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경쟁력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현대사회에서 외모는 정말 심각한 스트레스와 당혹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외모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상업적 가치를 창출해낸 현대사회에서 외모는 마치 모든 것의
우선순위가 되는 듯 포장이 되지만 그래도 자신의 개성을 잘 표출하여 그 개성을 사줄수있는
사람들의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책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하필 화장실이였을까? 
나에게 독특한 독서 습관이 있다면 내손에 닿을 곳에는 책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독히 책을 안읽는 내 습성을 나 스스로 아는터라 어느 상황에서도
손에 집히는 것을 읽도록 스스로 준비를 해둔 탓일 것이리라.


화장실 소품 바구니에 덜러덩 놓여져있던 책..
평소에 다른책들 틈에 짓눌려 기도 못펴고 숨어있었던 책,
언제 구입을 했는지 기억도 없다, 왜 읽지 못했는지 정확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특장점은 가독성이었다.
마치 후루룩 국수 먹듯이 눈으로 쭈욱~,  생각을 별로 안하고 봤다는건
주제를 감싸는 그안의 결론은 당의정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걸죽한 꿀물이지싶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쓴 박현욱이라는 사람,  축구 마니아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이렇게 축구에대해 생생한 자료와 절묘한 에피소드를
사랑과 인생에 대비해 썼는지 한마디로 깜놀이다.
축구가 대중을 현혹시키는 방식은 이 작품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하루키에 있어서 가독성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섹스’라면,
박현욱은 ‘축구’를 선택한것이 아닐까싶다.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도 좋고, 일부일처제의 허상도 좋다.
그런데, 이를 말하는 그녀가 나쁜 인간이란 점이 아쉽다.
그녀의 무책임한 정직은 유아적이다. 그 참담한 정직마저 주변인들에 대한
거짓과 기만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그녀는 상황의 직면을 회피하고, 교활한 눈물로 호소하고, 몸으로 덤빈다.
그녀의 이기주의는 절대 타협이 없다. 현실의 사내가 그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작가가 도와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성이주는 고정관념과 행복에대한
이상적 관념을 작가는 아주 치밀하게 배치를 했다고나 할까?
긴장감을 유지와 재치가 나름 있었던 작품이긴하다.


이 책에대한 나의 결론...
흥미롭고, 불쾌하며, 재미있고, 언짢은 작품이다. 

 

 

이맘때 책 냄새는 한층 눅진하고 꿉꿉하다.
오래 곰삭은 것들과 이제 삭기 시작한 것들이 어우러져 날 선 신경을 어루만지고
가라앉히는 냄새.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 위로 펜 지나가는 소리,
나지막한 인기척, 멀리 들려오는 경적 같은 온갖 소리가 빗소리에 자리를 내준다.


빗소리의 블랙홀에 빨려들어 분간하기 어렵다.
고개 돌려 창 밖을 보면 바깥세상을 점령한 하늘 물줄기가 유리창 너머
이쪽을 끊임없이 넘보고 있다. 부딪치고 치근대고, 끝내 적시지 못하고 꼬리를 끌며 거꾸러진다.
그래도 은밀히 품은 비린내는 기어이 사람들이 아는 통로와 모르는 통로로 흘러 들어와
책 냄새를 진하게 만든다.


가방 속에서 미지근해진 캔 커피가 유난히 감겨 들고, 기억 보관함 속에서
미약하나마 생기를 간직한 장면들을 책상 위로 술술 불러낼 만큼 진하다.
단지 기분 탓이라고 한구석 제습기가 심드렁히 말하는데도,
방심한 틈에 어느 페이지 어느 구절이 후두두 떨어져 내리며 파문을 남긴다.
파문 너머로 삼엽충과 암모나이트가 잠깐 비치다 사라진다.


고즈넉한 행간의 기묘함을 몇 번이고 엿보고 싶다.
언제까지나 빗소리와 함께 글자를, 종이와 마음을 오가는 글자를 영원히 꼭꼭 씹어먹을까?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지인으로부터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라는 책을 선물 받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갑자기 건강문제와 주위의 산만한 일상들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행 이도 내가 가입되어있는 독서클럽 발제가 위험사회였으므로 한참 걸릴 시간의 독서량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첫 장을 읽을 때부터 거의 마지막 장까지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는 조금은 협박적이고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현대사회의 위험을 알린 책이라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의 위험은 항상 두려움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심리를
통제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울리히벡은 심각성을 주장하고 있다.


왜 현대는 이런 위험요소를 가지는 것일까?
현대의 일상성을 보면 인간생활의 편리성을 위해 아웃풋을 만들어내는데 그 잉여가치를
위해 가장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그 무엇을 동원해도 인간의 문명을 위해 자연의 재해나 생명의 존귀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런 문명의 발달이 인성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의 정의로움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근대화라 칭하고 이러한 근대화의 성공은 새로운 위험을 수반한다,
울리히벡은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접근한다
울리히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려 이렇게 표현한다,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근거 있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생기는 모든 폐해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요인으로 즉각적인 위험요소를
개발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불안해 하지만 결국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과학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고 인간의 삶은 더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울리히벡은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고 인간중심의 세계를 찾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즉 인간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진보만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과학기술, 어찌 보면 편리함과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 생성과 소멸 가운데 인간의 의지로
관여될 수 없다면 결코 행복 해질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올바른 주장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 책은 볼수록 어렵지만 울리히벡 책 역시 만만치 않은 책이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근대를 살아가는 아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일독을 함으로
자신의 주체성에대한 그리고 문명에 대한 접근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는 개념의 책이라 생각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20세기에 책이 발간되어 21세기를 거쳐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조금은 오울드니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타의 문제를 제외한다 해도 핵에너지 기술 발전에 복속된 문제를 본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를 5가지로 압축해본다면....


1. 현대의 위험은 방사성과같이 인간의 평상적 자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2. 위험의 사회적 지위가 나타난다.
3. 위험의 확산과 산업화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린다,
4. 부는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5.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5가지로 압축을 하고 나니 아주 오래 전 살찐 장미의 위안이란 제목으로 블러그에 글을
써놓은 것이 생각났다. 아마 위험사회의 내용 압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느꼈던 느낌대로 느낄지 모르겠다.
책이라는 게 읽는 이들의 감성에 따라 달라지니 말이다 .

 

 

그때 써놓은 글을 잠깐 발췌하면..


자정 넘겨 집으로 가는 길...
강으로부터 조금씩 배어 나오던 안개가 어느 틈에 길을 침범하기 시작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차들 때문에 막연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짐짓 모른 척 묵묵히 달리고 있는 차들 틈에서 바람에 실린 물결처럼
떠내려 가고 있는데, 흐느끼는 듯한 아리아의 가락이 라디오에서 마악 시작될 무렵,
영동대교 조금 못 미쳐 갑자기 엉켜져 있는 불빛들이 속력을 막아 선다.


사고가 났다.
세 대의 차 중 두 대는, 고무찰흙을 벽에 세차게 던졌을 때처럼
앞쪽이 뭉개져 있고, 사륜구동 차 한대는, 반듯하게 뒤집어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렉카차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고 뭉겨진 차 옆 흔적에
핏자국이 흥건하고 이미 환자를 실은 앰블런스는 떠나갔는지 무질서하지만
평온함의 평정을 찾고 있었다.


몇몇의 남자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이고,
내가 그들 바로 옆을 비켜갈 즈음,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오고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한다.


또 다른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교통사고로 인해 재판장까지 서야 했던 그 기억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엇갈린 희비.


가해자는 자기에게 닥쳐진 불행이라 말을 할 것이고.
피해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날벼락을 맞아 병원신세를
져야 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어야 하는 시련을 맞게 된다.


문명의 편안함이 가져다 주는 두 얼굴의 변화.
엑셀을 세게 밟으며 죽음으로부터, 아니 죽음에 근접한 사고의 공포로부터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올리히벡의 위험사회를 읽으며 포퍼(R.Popper) 반증주의를 처음 제시한
" 과학적 발견의 논리" 라는 책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 걸려 읽지 않은 책이라 수박 겉 핧기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울리히벡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태학 산문선 중 허균의 산문을 엮어낸『누추한 내 방』을 일년동안 읽었는가보다. -..-;;;
오래전 동서고금의 혁명가들에 대한 관심이 있던 시절에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을 읽으며,
옛사람의 탁견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말한 ‘열명의 똑똑한 사람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비약이 심한 것일 수 있으나, 원민(怨民)을 충동하고, 항민(恒民)의 손에 죽창과 낫을
들게 하는 것이 시대를 읽으며 때를 기다리는 호민(豪民)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호민론’에서는 당시 위정자들에게 호민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 어조일지나,
‘칠서의 옥(七庶之獄’)으로 죄를 얻고, 결국 역모의 죄로 생을 마감하는 그의 삶을 볼 때,
스스로를 호민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책의 내용이 쉬운듯 보였으나 읽어보니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어(漢語)들이 나오는터라
솔직히 읽긴 읽었지만 전체 내용만 알지 속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더 공부를 하면
이런 산문집을 읽어내려갈때 좀 더 쉬워질까 생각을 해본다.

 

푸줏간 안에 자취를 감추고 몰래 다른 마음을 키우며 천지 사이를 흘겨보다가
요행히 시대의 변고라도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바를 팔고자 하는 이는 호민이다.


대저 호민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호민은 나라의 틈새를 엿보고 일의 기미가
기세를 탈 만한 것인가를 엿보다가 논두렁 위에서 팔을 휘두르며 한 번 크게 외치면
저 원민들은 소리를 듣고 모여들며 도모하지 않았어도 함께 소리를 외친다.

저 항민 역시 살기를 구하여 호미, 고무래, 창자루 등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따라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호민론 中(p. 200)’


이 책에 실린 허균의 여러 산문들 중에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재론(遺才論)이다.
하늘이 각 사람에게 재능을 내릴 때, 적서(嫡庶)의 차별 없이 고루 내리는 데,
사람이 하늘의 뜻에 등지고 이를 차별하여 사람의 능력까지 버린다고 한탄한다.

이러한 그의 문장은 진나라 이사의 명문 ‘간축객서(諫逐客書)’에 견줄 만 하다.
그 밖에도 ‘먼저 간 아내 김씨의 행장 (亡妻淑夫人金氏行狀’)은 읽는 이 뉘라도
가슴 저미는 슬픔을 함께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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