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는 3 가지 큰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즉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일, 다른 하나는 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부가적인 일(業)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을 찾기위한 일이고, 자신을 사랑하기위한 일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밥을 한다든가, 청소를 한다든가, 세탁을 하는 집안 일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 일 것입니다. 이 부가적인 일을 왜 남자가 하느냐고 묻는분들이 많이 있을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매일 하는것은 아니지만 집안일을 하는것이 나같은 경우에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터라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존하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합니다.
대부분 일주일에 한번 몰아하는것은 집안 청소 하는일, 빨래를 하는일, 그리고 매일 해야만 하는 일은 밥이나 반찬을 만들고 식탁에 기본반찬을 놓는일, 수저를 놓는일, 청소를 하면 나는 걸레를들고 바닥을 딱는일, 빨래를 게는일,등등 공동의 삶에 필요한 일들을 스스럼 없이 해내고 즐겁게 한다는것에 이유를 달 필요는 없는듯 싶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궁극적인 삶을 위한 일(時間/ Business) 입니다.
그 궁극적인 일이 시원치 않으니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쓰러지지않고 있다는 것이죠. -..-;;;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구요,
암튼, 이 세가지의 일을 병치시켜 하나로 엮는 것이 요즘 내 삶의 과제이고 추구하는 삶의 길 입니다. 그러나 정말 쉽지 않은듯 싶습니다.
첫번째 일과 두번째일은 어떡하든 해내면 그럭저럭 해나갈 듯 한데... 늘 문턱에서 마지막 세번째의 일로부터 거절을 받고 있다는것. 내 삶을 아주 피폐하게 만드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들은 얘기 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드는데 무슨 삶의 여유를 찾는 자기만의 일을 갖으려 하느냐고 하지만 내 삶속에 자유를 갖고 나만의 여유를 찾기위해 또하나의 세상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구속따위는 받지않는 온전한 나의 일이 필요하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내 삶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며 도모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모반의 희망을 가지고 하늘을 날기 위해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자기 만의 일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두가지의 일(業)과 일을 병치시켜 삽니다. 사실은 이 시걸의 삶이 내가 지향하는 목표이고 그 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열 일곱살 꿈 많을 때... 나는 그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시걸의 자유와 그의 날개를 몸과 마음에 붙이길 원했으나... 나는 여전히 전자의 두 가지 일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사실 먹고 살기 위한 일과 그 먹고 살기위해 유지해야하는 일상에 삶에 채이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자기가 꿈을 꾸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인간이 먹기 위해사는 것이 아니란 명제는 아름답고 그럴듯하지만 실상 누구나가 이 먹고 사는 문제에 목이 매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잔혹한 현실은 가장 기본적인 일에 얽매어 사람들의 꿈꿀 권리를 앗아갑니다. 일상을 위한 일에 허덕이다보면 꿈꿀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꿈을 위해 일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일상이 주는 삶의 여백과 일상이 만들어 주는 공간에서 나머지 세 번째의 일이 시작되어 그것이 결국 일상으로 전환되어야한다는 것이 내가 세 가지의 일을 병치시켜 살고자 하는 방법론 입니다.
나는 이 문턱에서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5월 들어 일이 없기도하고 덧없이 보낸 하루가 많아서인지 비가오는 이 아침 마음도 쓸쓸하고 등뒤로 다가오는 삭막함 때문인지 을씨년스런 하루가 마음을 닫히게 하는것 같습니다. 물론, 또 다른 하루를 내어 살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에 희망이 나의 몸을 일으켜 세우게 합니다.
제게 블러그는 내마음을 전하는 소통의 공간 입니다. 동시에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따금 글쓰기가 힘겨울때가 있습니다.
글로써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은 비판 할수있다면 좋은일이겠지만 아직 어느것이 옳고 그른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늘 스스로 되묻곤 합니다. 정녕 인텔리겐치아인지 말입니다.
요사히는 이 블러그엔 식구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같이 북적이지않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소통의 공간이 스마트 폰으로 옮겨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드는데.. 그 이유야 어떻다해도 과연 이 작은 공간에서 어떤것들을 얻어 가시는지 궁금 합니다.
개인의 신변사? 한 개인의 사랑 이야기? 잡다한 지식? 오시기는 하는것 같은데.. 흔적은 없습니다. 아직도 제 삶이 견고하지 못함일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견고하지 못한 삶을 소통이라는 만남을 통해 얻을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 있어 잔인한 4월은 나름대로 위안받을 수 있는 정도로 수습되고 대처 되었다. 5월 일을 시작하는 첫날... 후배의 초청으로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나 할까?
형!! 김은영이라는 가수라는데 노래를 잘한다네?... 아마 그 후배도 그 가수가 누구인지 몰랐던것 같다.
빠에서 작은 콘서트를 한다 하는데 처음엔 재즈가수 웅산의 본명이 김은영이여서 재즈 장르의 가수라 이름을 후배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에 덜컥 그 콘서트 나도 갈께.. 헉!!! 나중에 알고보니 포크가수 김은영이라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설은 가수 이름...
봄에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을 예측하기란 참으로 어렵듯이 나 역시 포크가수 김은영이란 말에 왠지 썩 내키지않는 것이 마음속에 갈까 말까를 수없이 망설이다가 그래도 약속이니 가서 즐기자는 마음에 따라 나섰는데 그날따라 날이 잔뜩 흐려 있는 품이 내마음같았다고나 할까?
내 삶에는... 편안함도 따뜻함도 미래라는 것도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어설픈 생각이든다. 하필 선택한 음악 콘서트가 알지도 못하는 여가수라니...? 이 세상에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 수 있는 작은 가슴마저도, 그만큼의 공간도 허용되지 않는 삶은 진정으로 없는 것일까?
마음이 스산하다. 바람은 바깥에서만 부는 것이 아닌가보다. 가슴의 밑바닥에서 이는 바람 또한 맵고 짜고. 시리다.
그래도 어딘가 있을 따뜻하고 포근한 세상이 있다고 믿었기에, 고통을 인내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여전히 그 삶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머릿속에 각인된 넉넉하고 아름다운 유년의 시절이라든가, 언젠가 젊은날 가슴 쿵쾅이며 사랑했던 여자아이의 상큼한 머리 내음처럼...
콘서트 시간이 되고... 처음 본 그녀의 첫 노래가 끝났을때 나는 이미 가슴이 흥분이 되고 있었다. 때가 묻으면 묻을수록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들이 있다고 하던가?
더께 앉은 때는 세월의 묵직함 때문에 가라앉듯 묵직한 색깔을 내보이는 가보다. 아마 거기에는 모진 풍파를 견뎌온 인고의 삶이, 발돋움하고 넘어보던 소망의 삶이 담겨 있어 그런것이 아닌가싶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가 라이브콘서트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이는 건, 조작되지 않은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 현실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이든다. 알고보니 그녀는 70-80년대 이필원 박인희가 만들어낸 뚜아에무아의 3기 여성 보컬 멤버였다. 그래서 역시... 하는 말이 나오는가보다.
가수는 라이브콘서트를 할 때 존재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 노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 . 그런 점에서 요즘같이 음반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거의 대부분을 웃기지도 않은 쇼(show)를 통해 쓸데없는 말장난이나 하며 스타라고 자처하는 아이돌 가수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매 하나와 댄스 동작 하나로, 카메라 각도와 조명, TV방송국의 상업주의와 맞물려 가수연(歌手然)하는 이들. 얼마나 상품 가치가 있는가가 중요하지 실제 그들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되지 않는 요즘 시대. 높거나 여린 목소리로 몇 소절 부르면 대단한 성량이니 감성적이니 운운하는 노래하지 않는 가수들, 노래를 들려주지도 않고 노래를 들을 수 없는 가수들. 어쩌면 우리는 노래가 없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노래가 없는시대는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대중가요는 대중들이 언제나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이며, 본래 그것은 대중이 창작하고 대중이 부르는 노래라 생각한다.
관념이 만들어낸 노래보다 경험이 만들어낸 노래의 생명이 더 길지않을까? 항상 되풀이하여 부르는 건 경험을 삭혀 낸 노래들이라는 생각. 대중가요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만남과 사랑, 이별을 한결같이 노래하는데. 노랫말이 어떻든, 박자나 음정이 어떻든, 노래는 부르는 이 자신의 노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노래이며. 얼마나 몸과 마음으로 우려내어 부르는가에 따라 노래는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은영 포크가수.... 처음 들었지만 아니 어쩌면 70-80 시대에 너무도 익숙하게 들었을지도 모를... 일단 그녀의 목소리는 곱다. 단아하고 청아한 톤의 목소리..
목소리가 곱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이 될 수 도 있다. 70년대라면 고운 목소리만으로도 주목받을 수 있겠지만 다양한 음악이 범람하는 요즘엔 개성이 없는 목소리로 밋밋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내면의 맘을 읽어내려가는 기술이 있는 것같다. 언젠가 들었을것 같은 느낌의 편안함과 흥겨움.. 여름철 시골 툇마루에 드러누워 솔솔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오수에 잠길 듯한 그런 휴식을 주는 목소리의 톤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모르겠다. 그녀의 콘서트가 끝나고 그녀의 1.2집 음악 앨범을 사들고 집에 들어오는 늦은 밤 모질게도 비는 내렸지만 머리위로 떨어지는 빗방물이 리듬이되어
나의 발걸음은 얼마나 상큼했었던지... 기분 짱이였음을 ^^*
일단 70년대 포크가수의 창법을 벗어난 조금은 모던 포크를 지향한 뮤지션으로 가능성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앨범 컨셉으로는 부족함이 드러나 보이긴 하지만 나름 그녀의 색깔을 분명히 한 음악 앨범이라는데에 이견을 달고 싶지않다. 다만 레퍼토리나 편곡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특히 1집은 창작곡도 몇곡 있었지만 리메이크 곡이 너무 많아서 아쉬움이 크다면 크다 할 수 있겠다.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진동하는 노래는 뚜아에무아의 보컬이 아닌 솔로가수 김은영의 스타일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앨범이 아닐까싶다.
사방에서 꽃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봄날은 싱숭생숭하는 마음만큼이나 불안정하다. 변덕 심한 계절이 봄이라는 세간의 평은 그 불안한 마음 탓이리라. 봄에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을 예측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오눌 밖의 날씨와는 다르게 내마음 지금의 날씨는 봄이 아니다. 서러워지고 있다. 결국 끝을 내어야 하는 결단력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내가 맡았던 작은 클라이언트 하나가 배째를 연일 외치며 일한 댓가를 도외시하고 있다 몇번이고 얼르고 인내하고, 가끔은윽박지르기도 해보고 했으나 결국 법정까지 가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내 일생중에 몇번이나 법정에 서봤던가? 가슴이 차가워진다. 일은 일로푸는 것이 아름다운일이건만... 클라이언트측의 사고는 참으로 배짱이 그득하다. 어찌하여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일까?
일을 시키고 그에 왜 합당한 댓가를 도외시하는 것일까?
무슨 배짱으로 사업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계약서는 쓰고 사람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일을 시켰을까? 아마도 클라이언트측은 시간끌다가 나중에 주면 되겠지 하는 마음일게다 우리나라 법제도가 그렇다, 나중에 무조건 주기만 하면 하는 관대함 때문일 것이다, 일한 댓가를 꼭 법정까지 가서 받아야 옳바른 일인지 내 직업에 회의가 느껴진다. 아니... 내가 가지고있는 사업적 비지니스 마인드때문에 더 괴로운 것 같다,
조금 더 마음적으로 독해져야 하는데 무감정하게 대할 수 없는 내 성향이 오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든다, 실로 차겁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업무를 진행했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사람들의 관계속에 진행되어지는 것들이
어찌 기계적으로 감정없이 업무로만 국한 지을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마인드가 업무종료 후 몇달이 지나도록 받을 것 받지못하고 오히려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는것이 아닌가 싶기도하다. 세상을 흑백으로 그려내는 일이 컬러로 그려내는 일보다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일때가 있다. 흑백에는 시각을 편안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강렬히 반응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색채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오늘 내 클라이언트에게 내가 마지막 먹은 결심은 결국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든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앞으로 영원히 만날수없는 망각의 루비콘 강을
건너야만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심으로 갑과 을의 관계가 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마음이 앞선다.
내일 법정에 낼 서류를 준비하여 고소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참으로 번잡한 일들이 산적해 있다. 내용증명부터 그 모든일들을 증명해야하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챙겨야한다.
기억을 더듬어 어느날에 무엇을했지? 머리나쁜 나로서는 기함을 토할일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빠진 서류가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볼 일이다.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계속 가슴이 쿵쾅쿵쾅,. 엄청난 스트레스 과중이다.
마음이 연약해서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이 아니다.
깊은 긴장감을 가지면 부정맥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와 한 몫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과연 이 결과를 내가 원하는 쪽으로 잘 결론낼 수 있을지도 사실 걱정이된다, 줄때와 받을때.. 선한 마음으로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 밖엔 어둠이 오고 여전히 시린 하늘과 차창에 비치는 황량한 풍경은 지금의 내마음 때문만은 아니길 바라고 싶을뿐이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을 끄는 이름모를 꽃들. 우리는 그 식물들에게 값을 매기거나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않지만 어김없이 우리에게 마음으로 다가오는것은 우리네의 삶과 야생초의 삶이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야생초편지를 읽으며 이 사람은 정말 마음이 순수하고 정갈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편지엔 그 야생초가 갖는 의미를 수사없이 전달을 해 줘 읽는이로 하여금 마음 훈훈함을 느낄수 있었던거 같다,
‘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
위의 글은 황대권님이 쓴 “야생초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범한 글이지만 야생초 편지를 읽으면서 그 분위기의 느낌에 공감하며 읽었을 때 받는 감정은 여간 다른 느낌이 아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났다고 뻐기는 인간들은 크고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 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새삼스러운 말이라 할 것도 없다. 본연의 형질로 변함없이 제 모습으로만 피는 야생초는 언제나 우리의 산야에 예전의 모습으로 피고 진다. 나는 우리 야생초와 야생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야생초를 좋아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이 고향인 나로서는 어릴적부터 시골에 대한 동경이랄까? 갖지못한 추억같은걸 은연중에 샘냈던터이다. 그래서 야생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해서 야생초 편지를 쓴 황대권님 마냥 전문적인 기술을 얘기 할 만큼은 아니고 길 가다가 보는 야생초 하나에 관심을 둘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꽃들은 패랭이, 민들레, 씀바귀, 할미꽃, 제비꽃, 인동초, 구절초, 개망초, 나팔꽃 정도이다
나는 우리 야생초, 야생화만큼 한국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담담한 가운데 수더분한 노련미가 보이는 지순한 할미꽃을 무척 좋아한다. 할미꽃, 그 할미꽃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이 인정스럽고 따뜻한 할머니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좋다. 할미꽃 이름도 얼마나 좋은가?
올해도 야생초들이 피운 꽃들로 향 가득하여 새와 벌과 나비가 다시 찾아와 일상에 찌든 나에게 싱그러운 평화와 뿌듯한 풍요를 줄 것같다. 왠지 이봄에 나드리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드는 건 무얼까? 밖의 날씨가 너무도 화창하다. 그동안 보지못했던 사람들에게 소식이라도 전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