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바람이 제법이다
마음이 스산하다.
가을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젠장~
바람은 바깥에서만 부는게 아니고
가슴 밑바닥부터 불기 시작 하는 것 같다.
바람 부는 날은 세상이 흑백으로 그려진다. 
 
흑백으로 그리는 것이 컬러로 그려내는 것
보다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 이라고
그림 그리는 친구가 내게 얘기해준 기억이 있다. 
 
시각을 편안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강렬히 반응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칼라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일까?

빛과 어둠이 조율된 하나의 대상.
삶의 양상을 그려내는 직선적 성향의 흑백.
감정의 이입이 없는 흑백의 깊이와 넓이는
편할 것 같지만 다가가기 두렵다.

객관적인 삶의 실체가 두려워지기
시작 하는 날,  카루소의 노래는 어떨까?
위대한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를 추모하는 흑백 같은 노래

루치오 달라의 카루소일까.
루이치아노 파바로티의 카루소일까?
절대 음감의 소유자 가수들..

그들이 뿜어내는 카루소의 느낌은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 수 있는 작은 가슴 같은
공간이 허용되는 아름다움이랄까?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리움을 표현하는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작은 밝음을 보는
서정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붉은색 와인 같은 처절함이
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루치오달라의 카루소를
리메이크 한 루이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카루소를 들어본다 
 
카루소 노래가사/ 
 
그는 목소리를 맑게 하여 노래를
다시 시작하네.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바다의 엷은 빛도 사라지고
아메리카의 밤을 생각하며.
나는 홀로 등불을 들고 방황하네 
 
하얀 뱃자국이  솟아 오르며
음악 속의 회한을 느낄때면
피아노 소리는 고조 되는데 
 
달빛이 구름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모습  부드럽지만
죽음을 닮고 소녀의 시선을 응시하면
그것이 바다와 같은 청록빛 
 
예기치않게 흐르는 눈물이
그를 숨막히게 하고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잘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ㅡ 중략 ㅡ

 

 

 

 

정말 오랜만에 뮤직에세이를 써봅니다.

작년 말에 글을 쓰고는 조용히 지내온 듯 싶네요. 어쩌다가 그리 됐는지 흑흑...


세상 끝에 오는 소리처럼 가을의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새로움을 전해 줍니다.

언제 여름이 있었냐는 듯.. 하나님의 여름은 내게 과중한 전기료만 잔뜩 빚으로 남기신 채

묵묵부답이시지만 계절이란 일관된 충실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그렇게 가을은 시작되고 8월의 마지막 날비가 내리기 시작 합니다.

엷은 풀 물을 바르듯 도로 위에 내 몸 위에, 내 눈썹 위에 조용히 마음을 적시며 내리고 있습니다.
비.. 왠지 그 비로 인해 쓸쓸하다는 느낌이 밑에 가라앉았던 외로움을 위로 솟구쳐 올려 보내는 것 같습니다.   

옷을 벗은 듯 갑자기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력하고 쉬이 절망하는 내 성격 때문일까요?

삶의 원리에 지쳐 쓰러지길 반복하는 내 생활 때문일까요?

심한 강박 관념이 조금은 허세를 보이며 위장하며 살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특별히 외로움을 극복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 외로움도 편안함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것은 모순의 덩굴에서 가끔은 나를 지극하게 사랑해주는 사람들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 사무실 안 열어 놓은 창 틈 사이로 차 오가는 소리와 형광의 빛들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 집니다. 아마도 마음 속에 달고 따뜻한 마음이 나를 간질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을의 시작을 여는 좋은 날 브람스 곡을 하나 들어볼까 합니다

세상에 너와 나가 존재하는 이상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길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런 상생의 개념에 잘 어울리는 곡 하나가 브라암스 곡입니다.

'Concerto for violin,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02' by Brahms  

사람은 쓸쓸한 존재이고 그 쓸쓸함을 보듬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심장을

울리고 공감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조용히 지하수처럼 맥을 이어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함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 존재들이 만나 함께 걸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원천이고 화합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사랑은 점유를 탐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닌가 싶고요. 

그런 의미의 합당한 곡이 브람스 곡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double concerto를 얘기하면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들지만

브람스도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멋진 곡을 썼답니다.

2악장에서 절묘하게 흐느끼는 두 악기의 조화는 브람스 음악의 진수라고도 얘기합니다. 


자, 볼륨을 좀 높이고 귀 기울여 보시죠.

Oistrakh와 Rostropovich가 연주하는 곡입니다. 

사실 이 곡은 브람스가 자신의 다섯 번째 교향곡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브람스가 이 곡의 형태를 협주곡으로 바꾼 것은 그의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하임' 하면 우리가 브람스를 이야기할 때 소금처럼 끼는 사람이죠.

당시 브람스는 요하임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브람스는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이 곡을 협주곡 스타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이 곡을 가리켜 '화해의 협주곡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브람스의 이 이중 협주곡은 낭만주의 음악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곡으로 모든 악기 중에서

가장 선율적이며 가장 변화가 풍부한 바이올린과 첼로가 독주 악기로 쓰이고 있으며

이들의 조화와 호흡이 아주 아름다운 곡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의미를 깊이 나누는 비 오는 8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벌써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다가오고 있네요.

돌아보면 왠지 슬픔이 앞을 가리고 없음의 존재가 왜이리 큰 것인지 새삼 힘들게 느끼지만

내게 주셨던 어머님의 사랑이 세상을 살면서 힘이 되고 용기가 된 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천국에서 잘 계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추석 전에 어머님 계신 곳에 찾아뵐께요. 편히 계시길 바랍니다.

 

 

 

Oistrakh, Rostropovich - Brahms - Double Concerto in A minor, Op 102


 


 


 


 

 

 

산다는 것은 예측불허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 펼쳐지기를 바라고 고난이나 극복하지 못할
좌절은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열심히 일한만큼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클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직은 그런 때가 되지 않아서인 걸까요? 아직도 제대로 심어지지 않아서
자그마한 시련을 주시는 것인지 내게는 아직도 세상이 시끄럽네요.

 

그래서 봄이 되면 작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을 가지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봄이 되면 왠지 슈만과 클라라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의 첫 곡인 아름다운 5월에는 이라는 대표적인
사랑 노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그러다 보니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카우와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도 자연스럽게
상기가 되고 따뜻한 봄을 맞고자 하는 연인들에게는 연가 곡들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벚꽃이 활짝 핀 4월의 봄은 왔는데도 아직은 내 마음이 추워서일까?
활짝 핀 수다보다는 침묵보다 깊은 한마디의 위로가 더 내게 갈급함은
민들레 꽃씨가 한 끝 깃털에 온 생애를 맡기듯 목이 말라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내 작은 몸짓은 아직도 꽃과 바람과 구름으로 맺어지지 않고 방황 하 듯
고독과 울분에 이르고 있으니 내게도 황홀하고 눈부신 꽃망울 터지는 찬란한
봄날이 오길 기대해봅니다.

 

그래서인지 이 봄날에 다들 슈만의 연가 집을 연상하고 떠올리지만 난 고통의 이마 위에
반짝이는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마이너 곡이 내 마음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 같아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아마 슈만이 작곡을 했을 때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슈만은 바이올린 소나타 2곡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1번 곡은 개인의 삶과 조직의
삶이 뒤엉켜 정신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작곡을 했던 터라
조금은 우울하고 암울하고 먹먹한 느낌을 주기에 딱 좋은 소나타라 말씀 드리고 싶네요.

 

특히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이올린이 주는 서정성과 피아노가 주는 정열적인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 조금은 거칠고 통 열한 느낌으로 다가와 무겁게 가라앉은 선율로
느껴지게 하지만 낭만적인 서사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세계가 얼마나
성찰적이고 시적 감각이 있었는가를 나타내 줍니다.

 

올해 제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마이너를 듣게 된 귀한 시간은 올해 초 내한 공연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 공연에서였습니다.
그날의 연주는 상상 이상의 아름다운 공연이었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사실 그날 그녀의 연주 백미는 슈만 바이얼린 소나타 보다는 바하의 파르티타 3번을

연주한 것이 인상에 남았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는 템포감각으로 흠잡을 때 없는

인토네이션을 주는 연주는 가히 장관이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 하고 싶습니다.
.
하지만 내게 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마이너 곡이었습니다
그날 연주회 초대는 제가 늘 아끼고 내게 힘을 주시는 분의 초대였기에 더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아마도 마음 고통 속 방황을 눈치채고 제게 작은 위안을 주려고 초대를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보며 늘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내 의식을 잠재우려는 게으름과 자포자기한 자조와,
흐느적거리는 흐린 시력과 멍멍한 청력의 나사에 기름치고 닦고 조여서 열정을
회복시켜 주는 귀한 선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힐러리 한의 연주는 너무나 부드럽고 서정적이어서 오히려 듣는 내내 슬픈듯한
느낌까지 드는 그래서인지 마음이 정돈되는 것 같았습니다.
힐러리 한을 얼음공주라 표현하는데 과연 감성적 극치를 보여주는 연주를 들으며
얼음공주라는 표현은 과한 표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물론 제가 듣는 귀가 아직은 열려있지 않고 내 감성에 맞춰진 표현을 생각하다 보니
평론가나 매니아들이 평가하는 냉정하고 평정 심을 잃지 않는 연주가로서의 정확한
평가를 스스로 왜곡되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힐러리 한이 연주한 슈만곡을 블러그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 유투브를
찾아 봤으나 아무리 봐도 없네요. 조금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힐러리 한을 능가하는
기돈크레이머 바이올린 연주와 마르타 아르게히의 피아노 연주는 엄청난 힘을
우리에게 전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봄의 날에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께서 펼쳐놓은 생명들 안에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만져 느낄 수 있게
나를 깨어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뿌리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Sonata no.1 in A minor Op.105 1st movement Mit leidenschaflichem Ausdruck

 

Violin Sonata no.1 in A minor Op.105 2nd movement allegretto 

 

Sonata no.1 in A minor Op.105 3rd movement-Lebhaft

 


 

 

 

 

  


이제 완연한 가을이네요.
정신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일때문에 잠시 계절감각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여유없는 마음 섶에 가을이라는 느낌이
깊게 파고 들고 느낌만으로도 시선은 낮아지고 가슴으로 휘어듭니다.


어쩌면 가을이란 말 때문에 혼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혼자라는 느낌때문인지 몰라도 괜하게 더 감성적이되어 영혼의 촉수가 넓어집니다.
마음의 눈이 넓어진다고 표현하는게 맞는 말 같습니다.


혼자라는 느낌..
서늘한 마음 어느 한자락만으로도 쉽게 신을 느낄수 있어 엄숙해지고 경건해집니다.
바로 이런때에 가을비가 뿌리네요.
지난날 신앞에 살아온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엮어지면서 부끄러워 집니다.


부끄러움때문에, 그래서 가을비는 차갑게 내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만이 가장 잘아는 내 온몸과 영혼의 과거.
부끄러운 과거가 더욱 선명하게 증거처럼 가을비와 함께 서럽게 아프게도 내립니다.


비맞는 가을 잡초처럼 올림픽 대로의 수많은 차들..
어딘지 모르지만 줄지어 외롭게 방황하 듯 쫓아가는 자동차 군열..
늘 다니던 길이였는데 문득 낯설게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인지?
오늘은 내가 무슨 역활을 하기위해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것인지?
어느 한가지도 가벼운 것이 없는것 같습니다.


내 인생의 여름철은 지나가고..
이제는 밑도 끝도 없이 넋두리와 푸념에 바빠진다는 것은 내 걸어온 실수의
발자국을 변명하기 바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변명하면 할수록 실수의
발자국은 더욱 더 선명하게 찍히고 가을 단풍처럼 불그레 물이 드는 수치감이란?...


그만큼 수치가 많아서일까요?
자꾸 캥기는 부끄러움과 미안스러움 때문에 얼굴빛조차 불그레 물이 드는 것은
경박스런 성품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외로움이 심해지고 자꾸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생각나는 음악하나가 있는데
혼자서 사람속에 섞여보는 즐거움, 혼자서보고, 듣고, 느끼고 감탄하고 그래서
내가 혼자만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음악은 바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 다장조 (Cello Concerto No.1 in C major, Hob.VIIb:1) 입니다.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어릴적 쓰라린 고독 속에서도 빛나던 꿈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성공이란 황금 면류관보다 화려한 포부가 가슴을 덥혀주고 열 끓게했던
그래서 갈등도, 고뇌도 고통도 모두가 기막힌 무엇을 전제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가슴 속 고독을 몰아냈던 희망의 음악 연주곡으로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든 첼로 협주곡 하면 2번 라장조가 대표적인 협주곡 입니다
첼로 협주곡 2번은 슈만의 첼로 협주곡 가장조와 안토닌 드볼작의 첼로 협주곡

나단조와 함께 3대 첼로 협주곡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숨겨져 잠자고 있던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 다장조가

훨씬 정겹고 우아한 느낌을 가집니다, 그 이유가 뭔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솔직히 음악적 소양이 부족한터라 멋드러지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 인터넷을

서핑한 결과 이런 글이 나오더군요.
딱 이거다 싶었던 말은 아니였지만.. 역시 전문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 이유는 첼로 협주곡 1번은 고전주의 소나타적인 면보다는 바로크적인 면이
많은데 오케스트라와 솔로가 대결하거나 퓨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tutti와 solo로

번갈아 나오는 면이 많고 그의 초기작의 특징인 행진곡풍이고 리토르넬리 같은 면이 많아

음악적 감성을 풍부하게 전달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동활의 음악정원 컬럼중 발췌)


솔직히 이동활씨가 얘기한 말이 뭔말인지 선뜻 이해로 와닿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하이든 적인 묘한 엘레강스와 윗트가 1번 다장조에서 느낄수 있어 선호하는편입니다.
1962년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미로슈 사드로의 첼로, 찰스 마케라스의 지휘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방송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습니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을 연주했지만 유난히 제 마음에 남는

연주자가 있다면 두명의 연주자가 있습니다.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는 밝고 우아한 선율미가 돋보이며 편안하고 서정적인 연주로

나를 감동시켰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상당히 귀족적인 음색을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하이든 협주곡의 초기 색채를 가장 뛰어나게 표현한 바로크적 연주자가 아닌가 싶네요.
밝고 경쾌한 1악장과  멜로디 메이커의 특징이 잘나타난 2악장도  매우 뛰어난 악장입니다,
오늘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 다장조 곡은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터넷에 보니 장한나 첼로 연주곡도 있던데.. 이 연주도 장난아니게 훌륭하네요. 

 

오늘도 음악 한 곡 들으시고 비오고 우중충한 날 외롭다 느끼지 마시고 즐겁고 행복한 상상으로

밝은 날 엮어가시기 바랍니다.

 


Franz Joseph Haydn
Cello Concerto No 1 in C major, Hob VIIb:1

1 Moderato
2 Adagio
3 Finale. Allegro molto

Mstislav Rostropovich, cello &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London, June 1965


 

 

 

 

 

 

 

 

가을이 왔어요.
따가운 햇살의 커튼을 밀어 올리며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좁다란 하늘의 가슴을 차츰차츰 넓히며 가을이 온 것을 느끼게 됩니다.


3일 연속의 8월의 마지막 연휴가 시작되면서 홀로 여행을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어디를 갈까를 고민하지 않았어요. 혼자였던 관계로 떠나면 바로 그곳이
여행지이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떠나기 전의 흥분됨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생각하고 떠나려는 사람의 표정이 마치 아픔을 겪는 사람의 표정이라니
무표정에 나는 당황하고, 그 무표정이 또 다른 표정임을 인식하려 깊은 생각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표정이 표정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바로 그 표정 속의 의미는 생활이라는 표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 전 낙향한 후배한테 가자는 제안을 하더군요.
정말 보물섬을 향해 가는 탐험가의 마음처럼 설렘이 왔습니다.
일초의 망설임도 필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임실로 내려가는 길은 정말 이게 고속도로인가 할 정도로 완전 주차장이었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연휴를 즐기려는 피서객들의 탈출방법이겠지요.
모든 게 정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흐름은 있었나 봅니다.
평소 시간보다 두 배나 더 걸렸지만 단절로부터 맥박 뛰는 파문을 받게 합니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조우...
한 평생 삶의 도처에서 그들과 마주치고 부대끼고 스치고 손잡을 수 있음은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살아 헤어지면서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생각이 들었지만
며칠 전 본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화가 시작되고 음식을 나누고 백 년도 살지 못할 것이지만
만날 때 마다 설렘이 드는 사람들..


진정으로 후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세월의 흔적이 이끼처럼 끼기 시작한 오랜 만남의 흔적들이 우리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염려와 격려, 그리고 또 다른 표정을 안도감 있게 배려하는 손길,
잠시 잠깐 머물다 올라온 하루였지만 버려두고 갈만 한 것이 없는 만남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날 듣고 싶은 교향곡 하나가 있다면 부르크너 교향곡 8번입니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최고는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브루크너 교향곡의 최고는 8번을 선정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9번이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 개인의 선곡방법으로는 브루크너 8번은 최대의 작품이고 최고는 9번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유는 바로 9번 교향곡의 아다지오이기 때문입니다..
혹 나중에 제가 브루크너 9번을 뮤직에세이로 쓴다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향곡의 완성도 면에서도 사실 매니아 층은 환장을 할 만큼 좋아하는 걸 보면
8번이 주는 위상은 대단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8번은 두 번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초고 판과 수정 판의 미묘한 차이…


제가 아직은 브루크너를 평가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음악적 지식을 전문가처럼 가지고 있지
않는 터라 깊이 있게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차이는 1악장의 피날레 입니다.
초고는 fff로 끝나는 반면에 수정판 이하는 ppp로 끝을 냅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알겠는데
더 미묘한 차이는 솔직히 모르겠네요.. 공부를 더하고 나중에 말씀을 드리죠. 쩝~~


그리고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 관현악의 편성 규모가 커지는 것도 8번 교향곡부터입니다.
7번 교향곡 까지는 2관 편성 이였는데 8번부터는 3관으로 편성이 바뀐다는 것..
이것도 특이한 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2악장의 스케르초의 시작되는데 배치만 보아도 브루크너가 베토벤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스케르초를 과감하게 2악장으로 배치한 이유는 7번의 성공으로
브루크너 자신이 작곡가로서 위치가 생겨서 베토벤을 모방했다는 비판에 브루크너 스스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3악장을 8번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거대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다지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프의 로맨틱한 선율 속에서 천상의 세계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지휘자들 역시 3악장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4악장이 좋습니다.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떠나 마지막 피날레의 금관의
최강주를 듣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의 대표주자는 바로 베토벤 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향곡 8번의 모델은 베토벤 9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1악장의 어둠 2악장의 투쟁적인 스케르초, 3악장의 숭고한 아다지오, 4악장의 환희에 찬
피날레 역시 평생을 베토벤을 이상으로 삼았던 브루크너 입니다.


개인적으로 수없이 많은 연주자의 손길을 통해 음악을 들어왔지만 그 중에 한 명의
연주자를 뽑으라 하면 저는 주저 없이 첼리비다케를 뽑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를 무시 할 수는 없겠지만..브루크네리안을
자처하는 지휘자를 뽑으라면 바로 첼리비다케이기 때문입니다.


소소한 음표 하나에 내포된 고저의 굴절을 다스리는 연주자라고나 할까?
턱없이 긴 호흡, 지속음까지 안배하는 각 악기의 울림. 시시각각 변천하는 각 악기의
섹션간 밸런스. 덕분에 다른 연주자에게서 중첩되지 않는 성부들이 제 모습을 찾는다 고나 할까?


갑자기 내지르는 캬라안이나 인발 같은 연주자 보다는 음의 덩어리를 다잡아 유유히
몰고 가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처음 들으면 바로 매력을 느끼는 연주는 아니지만
들을수록 빠져드는 연주임에 분명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브루크너의 모습이지요,.


연휴의 두째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단 5분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세상이지만 또 다시 만날 해후를
생각한다면 가을의 한 가운데 서있어도 맥박뛰는 설레임으로 기대 넘치는 삶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Anton Bruckner - Symphony Number 8 in C minor
Version 1890 - Edition: Leopold Nowak
Münchner Philharmoniker conducted by Sergiu Celibidache
Live Suntory Hall Tokyo, 20 October 1990
1. Allegro moderato
2. Scherzo. Allegro moderato - Trio, langsam
3. Adagio. Feierlich langsam, doch nicht schleppend
4. Finale. Fierlich, nicht sch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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