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일렁이는 빛무리처럼 다가오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소중한 환상을 두 손으로 길어 담아 봅니다. 제 가슴속에...
때로 홀연히 나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 하나의 몸짓을 떠올리면서
환상의 묘비에 들린 듯 그 사람을  침묵속에 깊게 맞어 보곤 합니다. 


그 사람을 깊게 맞아할때면 불투명하고 안개 낀 환상의 산숲과 들판의 고요 속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공기의 흐름, 바람의 흔들림, 나무의 몸짓,
햇빛의 떨림까지도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 처럼 다 만지고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바삭바삭바사삭...
발걸음  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찾아드는 깊은 고요...
가슴 속에 커다란 침묵이 찾아들어 삶의 북풍이 불어올 때 나는 말없이 허무에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고독의 얼굴과 만나게 됩니다.
그 고독의 얼굴과 마주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기도 하구요.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남자의 정복적 욕망과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처럼
화해스러운 욕망의 얼굴을 하고 있노라니 나의 정신 틀은 견딜수없는 파열음을 내고

나를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어느것이 정답일까?
오직 정신적 영혼만을 갈구하는 사랑이 진정성있는 사랑일까?
그 자리에서 두손모아 무엇인가 존재의 해방을 위해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건지
어느것이 진리이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신은 제가 터득하고자 하는 소망을 알아주시겠지요?
마치 깊은 영혼의 계곡에서 스며나오는 듯한 인간성의 아름다움과 매혹이 끝나지않는

음악과 같이 깊은 여운을 남겨줍니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이슬 같아서 환상 속에서라도 그사람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언제나 늘 행복해하며는 심술궂은 운명의 손이 닿는 것 같아서 나는 어떤일에도
기쁘기 이전에 두려움이 앞서곤 합니다. 그래서 슬픔도 기쁨도 가슴속 깊은 곳에
침전 시켜 버리려 합니다.


어떤 조건도 없이 순수하게 마음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나의 여건이 주어지길 바랄뿐입니다.
언젠가는 내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그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사랑은 죽지 않는 것이라고.... 이 가을 깊어가는 서정속에 나를 맡겨보고 싶습니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은행나무 잎들은 맑은채색의 무늬를 엮어내고 있었지만
길거리의 낙엽들이 반란을 일으키 듯 바람에 이리저리 혼란을 이루는 걸 봤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슴이 터질 것 같고 현기증이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가을이 주는 묘한 감성은 아마도 영원(신의차원)과 시간(인간차원)의 명합을
시도해보는 그런 계절이 아닌가 싶은데요. 내가 믿는 신께 간절히 사랑하는 해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 받는 계절이 아마도 가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음악가 한명이 바로 브람스 입니다..
그리고 짙은 커피향도 떠오르구요, 그래서 브람스는 가을.. 아니 만추의 남자가 아닌가 싶어요
이름없는 악사를 아버지로 둔 브람스,, 그는 요한 야코 브람스의 음악적 영향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는 음악 정규교육을 받지못한 무학의 음악가 입니다.


브람스의 음악적 텍스추어는 묵직한 중저음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람스 음악에 곳곳에 저현의 선율들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평생을 살았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니였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뮤직에세이에 올릴 음악은 브람스 교향곡 1번 C단조 op68 입니다.
교향곡 1번에 전해지는 브람스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 등뒤에서 다가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 라는 말은 바로 베토벤이 아니였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말하자면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앞세대의 거장 베토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베토벤은 1892년 죽었어도 그 영향은 19세기 내내 베를리오즈 바그너 브람스 등

수없이 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향속에 음악적 성과를 나타내려했던 초기작품이니 브람스 교향곡 1번이 주는
묘한 쾌감은 아마도 이런 것 에 있지않나 싶습니다.
브람스는 외형적 고전주의의 껍질을 깨고 낭만주의적 내용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광기를
온전히 접합시키는 교향곡이 바로 1번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내는 것과 드러나는 것의 어울림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브람스 1번을 듣고있노라면 베토벤의 브람스인지 바흐의 브람스인지 잘 모를 정도이고
어쩌면 바흐의 베토벤(교향곡 1번)이고 베토벤의 바흐(레퀴엠)이고, 둘다이고 그렇다 입니다.


다만, 교향곡 1번 4악장 중간부분에 새로운 주제가 나오면서 흡사 시간의 공간으로 아니면
공간이 시간으로 혼동 전화되는 듯한 착각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충분히 탐미적이고
안정감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워낙 많은 평론가들이 말들을 많이해대서..ㅋㅋ


특히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푸르트뱅글러와 로얄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음반은 흥미롭습니다
제 뮤직에세이를 많이 읽었던 분들은 이 친구는 푸르트뱅글러만 좋아하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로린마젤, 클렘펠러 캬랴안, 번스타인, 칼뵘, 너무 많은 지휘자들을
좋아하고 심취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곡을 해석하고 멋지게 연주를 했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것은
바로 푸르트뱅글러와 네덜란드가 자랑하고 싶은 유명한 오케스트라 콘서트허버우 오케스트라..

오늘날 이 오케스트라가 있게해준 푸르트뱅글러... 그후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리카르도 샤이,

현재는 라트비아 출신인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를 맞고 있을정도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입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정상급 오케스트라 하나쯤 갖는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입니다.

어쨋거나 브람스 심포니 1번 연주가 아주 훌륭해서 내게 결정적으로 대접을 받는게 아닌가 싶어요
이것은 궁합이라고 하는 것인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르트뱅글러가  콘서트허바우와 함께하기 때문에 더 특색이 잇다는 것은 정통 후기 낭만파적인 울림이

브람스적이다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평론가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지요?
가장 브람스적인 연주- 그것을 모노토닉한 화려함과 인간적인 감동을 모두 갖춘 연주라고  말입니다.
아마 푸르트뱅글러의 특기인 음색을 만들어내는 여타의 마에스트로가 꿈꾸지 못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분명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브람스를 진짜처럼 표현하는 콘서트허바우 같이

파트너로서 동반을 했다는 것은 환상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오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남모르게 혼자서 상념을 방관하면서 하늘과태양과 별과 빛을 좇으며

호젓한 행복감에 젖어 들고 싶다면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함께 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11월 중순.. 이제 겨울이 몰려와 가을을 쫒아내려 하는 만추에 브람스를 만나게 되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런 음악을 듣게 채찍질해주신 블러그 친구 빛마루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아마도 이 세상의 미소가 아닌 것 같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발견하실 겁니다.

 

 

일단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와 Mariss Jansons 지휘로 함께하는 전악장을 들으시고 나서

푸르트뱅글러와 로얄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 곡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Brahms Symphony No.1 in C minor op.68
1. Un poco sostenuto -- Allegro
2. Andante sostenuto
3. Un poco allegretto e grazioso
4. Adagio - Piu andante - Allegro non troppo, ma con brio - Piu allegro
Mariss Jansons , Conductor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10월의 마지막날..
올 가을은 의식에 감촉되는 나무며 잎새 그리고 풍경의 인상이 소슬하고
인간존재의 너무도 미약함 앞에 심약해집니다. 내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제 무력함 앞에 마음이 우울할때 나를 보듬어 주었던 것은 무엇이였을까?


사람에게 치유받기 원했던 삶은, 계절의 바람에 스쳐 허무하게 지나가고
또 다른 치유를 위해 부활하는 기다림을 잉태한다는 것...
부정을 넘어선 긍정의 유유함을 이 가을 시월의 마지막 날에 주고 있는듯 싶습니다


내 마음 속에 호젓함으로 다가오는 그 청정함의 사랑,
물론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의 구정물 같은 사랑일 수도 있을겁니다.
조금은 세상의 풍진으로 흐려지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세속의 찌든 실존은
성숙한 의미로만 남아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걸 누구에게  탓할 수 없음이지요.


내 현실 상황 속에서 세상의 말들이 지니고 있는 풍진으로 인해

내 머리 속의 빛깔들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공백으로 고갈되어 버린 두뇌,

자기의 본체도 투시할 수 없는 사색의정지, 마치 살아있는 송장처럼

산다는 의미조차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다시 나의 내부에 영혼의 씨름이 시작될 때면 결정적인 오뇌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의 본체를 되찾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내적 인간 실존을 심어주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내가 믿고 따르는 신이며 절대자 예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삶의 귀결은 언제나 미지의 숙제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약간씩 그 미지의 윤곽을 부각 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내 의식속에 깊은 존재의 만남으로 여운을 남겨주는 환상적인 음악 하나가 있지요.


사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를 동경했었더랬습니다
그러나 나는 음악을 전공하지도 못했고 악기 하나도 다룰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지요.

음악성이 받춰주지않는 너무도 박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변함없이 지금까지 연인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합니다.


산골짜기에서 졸졸거리며 흐르는 냇물처럼 조용히,

때로는 폭풍처럼 웅장하게 파동쳐 오는 리듬의 굴곡 속에서 나는 자기를 잊고

황홀하게 도취되곤 합니다. 서글픈 흐느낌처럼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처럼

굽이쳐 오르는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소박한 트럼펫의 음이 전해주는

외로운 여운과 청아한 피아노의 선율은 나에게 푸른 꿈을 가끔은 안겨줍니다


그리고 그런 음악에의 애착이 지식과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 나를 인도하곤 합니다.
이렇게 잠시나마 무아의 경지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때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석양의 저녁 숲 바라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주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나를 바라다 보며 손짓 하는 듯 했습니다.
석양이 주는 환상은 때론 폭풍우처럼 밀려드는 형체 모를 하나의 감정으로
때로는 원시림 속의 잔잔한 호수처럼 가눌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오늘 시월이 가는 마지막날 환상처럼 떠오르는 곡 하나가

바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입니다. 금방 확하고 떠오르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선율이고 귀에 익숙한 클래식 곡일겁니다.

특히 2악장에 나오는 왈츠는 아~ 맞아 이곡이구나 하는 탄성을 지를 것 입니다.


레오나드 번스타인 지휘자가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1976년에 녹음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들을 때마다 나는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를 떠올리게 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물론, 실제로 푸르트뱅글러가 <환상교향곡>을 어떻게 지휘해냈는지 저는 들어본 적이 없어 모릅니다.
다만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환상 교향곡>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이랄까 박력이랄까?...
요컨대 다른 지휘자가 결코 구현해내지 못하는 어떤 고강도의 집중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특성이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빛을 발하는 푸르트뱅글러의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고밀도의 정서와 감흥 혹은 음악의 혼(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과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푸르트뱅글러가 <환상 교향곡>을 레오나드 번스타인처럼 지휘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적어도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환상 교향곡>에서
푸르트뱅글러적인 어떤 음악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해서, 푸르트뱅글러와 그 음악적 스타일에서 가장 가까운 지휘자는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쎄요, 푸르트뱅글러와 레오나드 번스타인 간의 친연관계를 이런 식으로 예단하는 것은 섣부른 처사 일까요?...
요는, 푸르트뱅글러의 <환상 교향곡>을 들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유투브를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고 다행이도 레오나드 번스타인 지휘로는 있네요
한번 들어보세요. 시월의 마지막날 현실은 괴롭고 힘들지만 환상교향곡 한곡들으시면서 힘냅시다.  

 

 

1악장 : 꿈, 정열 / Rêveries – Passions (Daydreams – Passions)
한 저명한 작가가, "정열의 파도"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 한 젊은 음악가가,

맘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매력을 다 갖춘 여성을 처음 만나, 무서운 사랑에 빠진다고 작자는 상상한다.

왠지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하나의 악상과 결합되어 그의 마음에 들어온다.

 

그는 그 악상의 정열적인, 그러나 기품이 있고 내성적인 성격이 그녀의 성격과 같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 선율과 그녀의 모습이 이중의 고정개념(악상)으로서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닌다.

이 교향곡의 각 악장에 , 첫 알레그로의 개시의 선율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울한 몽상상태에서 , 착란한 정열에 이르기"까지의 경과가, 분노와 질투, 마음의 평안, 눈물,

종교적인 안위가 섞여 제 1악장의 소재가 되어 있다.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1st movement: part 1: Largo (Rêveries), Paris, 1976

 

2 악장 : 무도회 / Un bal (A ball)
그 음악가는 자기가 인생의 가장 복잡한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소용돌이 속에 끼어 들기도 하고 자연미의 평안한 사념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도 들에서도 어디를 가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3 악장 : 들 풍경 / Scène aux champs (Scene in the Country)
시골에서의 어느날 저녁, 멀리서 두 목동이 부는 목적 소리가 들린다.

이 목가적 이중주, 주위 환경 미풍으로 조용히 살랑이는 나무들의 속삭임,

그가 최근에 발견한 희망의 싹, 이러한 모든 것이 결부되어,

그의 마음을 이상하게 평온하게 하고, 그의 생각을 밝게 물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고독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이젠 고독을 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 그러나 만약 그녀가 모른다고 배신한다면 - 이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기분, 어두운 예감으로

어지럽혀지는 이러한 행복의 사념이, 아다지오 악장의 주제가 되어있다.

마지막에 목동의 한 사람이 다시 목적을 부는데 상대는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멀리서 천둥소리...고독...정적...

 

 

 

 

4 악장 : 단두대로의 행진 / Marche au supplice (March to the Scaffold)

그의 사랑이 거절되었음을 확실히 안 작곡가는 아편으로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치사량에 이르지 못하여, 그는 무서운 환상을 수반한 깊은 잠에 떨어진다.

그는 애인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 받고, 단두대에 연행되어 자신의 처형을 보는 꿈을 꾼다.

행렬을 , 때로는 음울하고 거칠며, 때로는 당당하고 밝은 행진곡의 소리에 맞추어 행진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굉장한 시끄러움을 타고 계속된다.

행진 끝에 고정악상을 나타내는 4개의 소절이 사랑의 마지막 추억처럼 다시 나타나는데

오케스트라의 결정적인 일격으로 지워져 버리고 만다.

 

 

 

5 악장 : 마녀들의 밤의 향연의 꿈 / Songe d'une nuit de sabbat (Dream of a Witches' Sabbath)

그는 그를 매장하기 위해서 모인 무서운 유령, 마술사, 마녀,

그밖에 갖가지 요괴들의 일단이 한 가운데에 있는 그를 본다.

야릇한 소리, 신음, 오싹하는 웃음,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다른 고함소리가 호응하는 듯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고귀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 야비한 선율에 불고하고, 보잘 것 없는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가 이 밤의 향연에 찾아온다. 그녀가 도착하자 환희하는 요괴들의 떠들음...그녀는 악마적인 밤의 향연에 낀다.

장례의 종은 "분노의 눈"의 익살광대의 풍자다. 밤의 향연의 윤무. 윤무는 "분노의 눈"과 결합한다.

위의 장황한 설명은 다시 개작되어 전체 악장을 아편의 작용에 의해 생긴 괴기한 환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그 대요를 적어 보면 [병적인 감수성과 격렬한 상상력을 지닌 젊은 예술가가 사랑의 번민으로

절망의 구렁에서 아편 자살을 꾀한다. 그러나 복용량이 적어서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기괴한 일련의 몽환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은 하나의 선율로서 나타난다.] 라는 이상 성격적인 것이다.

 

 

 

위의 해설에 대해서 너무 강박적으로 얽매이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곡가가 감상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곡에 대한 심상을 불어넣기 위한 도구로써

환상교향곡에 대한 감정을 북돋워주는 역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자들은 자신이 의도한 환상교향곡의 충분한 이미지를 감상자에 충실하게 전달하면 된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느낌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동일한 모습의 환상을 바라는 것은

그렇게 마땅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곡의 연주라는 재창조의 의미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출처 : http://www.goclassic.co.kr/review/9904a.html

 


 

 

 

오늘 지인께서 요즘 왜 글을 안쓰냐고 여쭤보시더군요?
그냥 쓸게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주위에 뭔가 쇼킹한것도 없고 글로 옮겨낼만큼
내마음을 움직일만한 일도 없다는게 불편한 진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답변이 타당한것인지 생각해보니 터무니없는 항변은 아니였나 싶습니다.
꼭 글이라는게 일상화된 이야기를 쓰는게 아니라면 그 어느것이라도 주제를 잡아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의 압박이 나를 움켜쥐더니
갑작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난김에 이 가을 정서에 맞는 뮤직에세이 하나를 쓴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오늘 점심을 먹고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 앞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우연히 바라보게 된 빌딩의 옥상,

빌딩도 아가미를 움직여 숨을 쉬어야 하는 숨구멍이 있어야 하나 봅니다.
가을 태양빛 따가움에 떨어지는 지붕 한쪽에 돌고 있는 환풍기 팬이 달린 지붕(?)
(적절한 표현이 생각안나네요) -..-;;,


숨어있는 고양이 처럼 빙글빙글 돌고있는 환풍기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큰 숨을 쉬어보고싶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환풍기..
나는 그 돌아가는 환풍기를 보면서 인간이 지닌 욕심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은 왜 만년 결핍 상태처럼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욕심을 낼까요?
빛에는 어둠을, 행복에는 슬픔을 각오하는 게 좋다는걸 왜 깨닭지 못하는 걸까요?
그곳에 긴장이 없어서 일겁니다. 그곳엔 의식이 없어서 일 겁니다,


설령 인식을 한다해도  그 의식 뒤에는 이율배반과 이원대립을 빚어내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해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때문일 겁니다,
저역시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 눈을 한번 질끈 감아보자.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만년 결핍의 욕심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의 도피일뿐..
의식의 갭이 메워지기는 커녕 점점 불안으로 다가오는걸 느낍니다,
갈갈이 찢겨진 자신의 수치스런 깨닭음은 한장의 거울이 되어 내게 다가옵니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거울이 나를 바라봅니다.
처음부터 거울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것입니다.
거울이 깨닭음을 주었습니다,


너무나 인위적인 틀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건 아닐까?
세상을 보고 사물을 이해한다는것. 그것은 아주 좁은 문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아주 다른 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본질과 현상은 그래서 다른것은 아닐까?
어쨋든 약속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틀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에 아무도 노래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노래를 했을것이고.
처음에 아무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했을것입니다.
아무도 미술이라고 이름 짓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혹은 호모 사피엔스들)
무엇인가를 그렸을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나무가 그렇고 구름도 그랬을겁니다.
어느때인가 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구름이라고 불렀고 또 미술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아무도 처음에는 꽃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장미라는 이름도 수선화도 코스모스도,
어느 순간에 어느 누구에 의해 그렇게 불려졌을 겁니다.
 

우리가 그 사물들에 이름을 붙히기 시작할때부터 생각은 좁혀지고 사고는 제한 된 것은 아닐까?
나뭇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처절하고 가련하고 허전하고 쓸쓸한 것들이
'참을 수 없도록' 넘치는 세상입니다. 나뭇닢 한 이파리가 가지는 무게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닳은 것도, 마음을 사위며 아파했던 세상의 난간에서 체득한 깨닳음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숨을 쉬어야 하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수평선너머 아득한 희망처럼 이따금 빛바랜 추억처럼 그렇게 문득 기억의 방문을 열고
내게 이야기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 그래 쉬어야지...


마음의 불안을 씻으니 가을 속 태양은 나를 향해 웃습니다,
그래요 가을이 왔지요. 예쁘게 연필을 정성껏 깎는 기분으로, 새공책에 새마음을 써야할것 가을.
이 가을에 맞는 음악 한곡 같이 들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가을이라는 계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를 꼽으라면 첼로가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내가 이야기한 인간의 결핍을 잘 보완 해주는 악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이올린처럼 가파르게 날이 서 있지도 않고 콘트라베이스처럼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은,
절묘한 중용의 품격과 무게를 지닌 가장 인간적인 냄새를 지닌 음색의 현악기라고나 할까요?...


뭐, 첼로에 대한 특별한 옹호론을 펴자는 것은 아니고요.
역시 가을 하면 저는 우선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같은 드보르작의 작품이라도 저는 <신세계 교향곡>보다는 첼로 협주곡 쪽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신세계 쪽은 왠지 전체적으로 그 정서가 들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드보르작 본연의 성정이 온전히 발휘된 작품으로 분류하기에는 아무래도 곤란한 요소가
있지 않은가 싶어서요.


물론, 제가 주로 듣는 것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입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1969년에 협연한 것의 녹음인데요,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시기여서인지 음질이 상당히 좋습니다.
그 음원을 제가 가지고있지요, 아주 오래전 CD도 가지고 있었고요.

 
단, 이것은 파플로 카잘스가 조지 셸이지휘한 체코 필과 1937년에 협연한 판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뭐, 두 사람 다 워낙 대단한 거장들이라 사실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는데, 음질의 차이가 너무 커서 마음과는 달리 저절로 비교가 됩니다.


카잘스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오리지널 디지털 녹음으로 발매되는 음반들의 음질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거기에 귀가 익다보면 모노로 녹음된 음반들은, 아무리 나중에 디지털리 리매스터링
되었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선뜻 듣게 되질 않습니다.


그래도 스테레오 정도는 되어야 귀에 들어오지요.
모노의 경우는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교향곡이나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쯤
된다면 모를까, 굳이 애써 찾아 듣게 되지를 않는 거지요.


그래도 카잘스의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은 그나마 이따금씩은 듣는 음반입니다.
오케스트라 부분은 몰라도 카잘스의 첼로 연주만큼은 듣다보면 모노 녹음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만큼 풍부한 정서적 울림이 있거든요.


하지만 역시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연주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에
로스트로포비치 쪽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합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화려하고 음영 짙은 오케스트라의 선명한 음색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먼 미래에는 모노 녹음도 스테레오 수준의 음질로 복원이 가능할 만큼의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만...
모노 시대에 워낙 역사적인 명연들이 많아놔서 말입니다... 


이음악을 들으며 생각나는 것은 바로 사랑 할 순간이 오는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해야지, 사랑하여야 겠습니다. 낮이 있고 그래서 밤이 오듯이, 
미움을 삭히기 위해서 기도가 있는것 처럼. 알지못하는 가을빛이 천지를 진동하며
빨갛게 익힘을 주는 장사의 힘같은, 강렬한 숨소리를 통해 사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열정의 힘은 정직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이 순수한 동기를 잘 알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정이 보배보다 귀하다라는 것을 깨닭은 지금 삶의 의미를 부여 받으니
기분전환도 필요할 것 입니다, 목적이 제시되니 쾌락도 필요 할 것입니다,
과거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고 현재를 살아 갈 수있을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을을 어떻게 지내실 것인가요?

 

 

 

 

 

 

 

 

 

 

 

 

 

 

 

 

 

 

 

 

 

 

 


 

 

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맛비가 퇴근시간에 때맞춰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 시간, 고스란히 비에 젖은 처량함과 고독감이
차츰차츰 어느 틈엔지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눈물겹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울대를 넘지 못하고 다시 속으로 흘러내려서는 온몸을 적시고는
숨조차 고르지 못하도록 가슴을 메우고, 목을 메우고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혼자 사는 삶이라서 그러지 싶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부정을 해봅니다.


고독하다는 것에는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몸...?
누가 굳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일다가도 자락이 잡히기도 전에
가라앉는 삶이니, 해가 바뀌고 나이 하나 더 든다고 달라질 까닭이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내리는 비를 보고 슬퍼진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를일 입니다.
하긴 내리는 빗줄기야 가을비가 봄비보다 더 처량할 터이요,
어제처럼 한여름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와 함께 온 땅을 적시는 장대비에서도
울음을 토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내리는 비란 온갖 때(垢)로 가득한 자연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나면 앞산도 더욱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고, 삼라만상 모든 것의 자태가 맑고
고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침녘에 긴 밤 기나긴 꿈으로 젖은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와,
한밤에 하루 일과로 지친 고단한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더없이 경건하고 신성한 노동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겹겹이 앉은 겉의 때를 씻어내는 그 조그만 시간은 그래서 더없이 진중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물을 쓰는 일이 겉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라고 한다면, 속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는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에티카(Poetica)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것도 어깨를 들썩이거나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눈물은 겉으로 쏟아져 나오질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흘러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런 기억을 갖고 계십니까?
오래된 영화에서나 흘러나오는듯한, 잡음 많이 낀 오래된 레코드 판처럼...
머릿속에서 힘겹게 돌아가며 아련한 음악을 쏟아내는 음성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빌리홀리데이의 음성입니다.


장대비가 그렇게 내리면 수많은 스크래치는 갸냘픈 신경사이를 배회하며
꿈결인듯 오래된 시간 사이를 헤매며 나의 속때를 벗겨내는 듯 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저 먼 시간 속으로,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그 아득한 경험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갑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오릅니다. 추억을 한다는 것은 더 괴로운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조그마한 공간밖에 둘러볼 줄 모르는 나는,
오직 내 몸뚱이 하나밖에 가리지 못하는, 참으로 이기적인 우산을 받쳐들고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빗속에서 갈 곳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까닭없이 우울했고 이유없이 슬펐으며 근거없이 외로웠고 건방지게도,
삶이 싫어지고 있었습니다. 위태롭게 지속된 사랑은 이제 곧 나를 떠나려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막바지에 다다른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슴 저리고 있었습니다.
삶이란 것이 빗물처럼, 형체없는 물처럼, 투명한 그 물빛처럼 그러하기를 원하고
있었는지 모를일입니다.


그날도 어제와같이 빗속에서 우산이 젖고 바지단이 젖고 마음이 젖어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서점에를 들어갔습니다.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통로, 날 갑갑하게 옥죄고 있는 사랑으로부터 날 구해줄
무언가를 나는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김갑수씨의 책입니다.


서점에는 그 책이 다소곳이 놓여있었습니다.
글쎄...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삶이 과연 남들보다 더 괴로운 것이고
남들보다 더 할 이야기가 많으며 남들보다 더 아파해야 할 것인지를?...
하지만 그 비 많던 7월의 어느 날 그 책은, 아니 그 책의 제목은 제 가슴으로 파고들어
내 삶이 그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게 괴로운 것이라는 최면을 걸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집어들었고 그리고......
음악을, 아니 재즈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나는 내내 빌리 홀리데이의 테잎을 듣고 있었습니다.

 

        

낡은 워크맨에 끼워넣어 회사를 오가는 길가 에서나 잠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깊은 밤이거나 빌리의 음성이 내 귓가를 채우도록 만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성은 빌리의 그것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었고 나에게는 먼나라의 이방의 언어처럼 낯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리가 근 한달이나 내 귓가에서 노래를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새된 목소리, 터무니 없이 작고 터무니 없이 힘 빠진 듯한 목소리에
나는 적응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김갑수의 그 책을 만났고 사랑이 날 흔들리게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재즈로 향한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다시 재즈에 옥죄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의 사랑만큼은 날 힘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재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시간...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오래된 시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의 생애는 57년까지였으니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악은 당연히 오래된 음반입니다.
더구나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 였으므로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성에는
지금의 완벽한 음향 사운드 시대에서 볼 때 형편없는 빈약함과 터무니없는 허약함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에는 지금의 기계 빛 음악이 줄 수 없는 어떤 아련한 추억과 쓸쓸함과
허무 혹은 낭만이 전해져 옵니다. 디지털 시대의 복원 기술로도 다 해결할 수 없는
스크래치와 잡음과 음향의 빈약함은 채워질 수 없음으로 인해 더더욱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갖고 계십니까.
머리 속에서는 오래된, 잡음 많은 레코드 판이 돌아가고 어딘지도 모를 과거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복귀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빌리의 음성을 들으며
그 오래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본 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빌리와 함께 잡음 많고 비가 내리는 그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어떨지 한번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방과 서울은 기후에 큰 편차가 있네요
서울은 후덥지근하고 왠지모를 짜증이 넘쳐나는 날씨입니다. 아마도 충청이남
지방은 폭우로인해 비피해가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빌리의 음반을 하나 소개합니다.
Billie Holiday-Strange Fruit : 1935-1944 New York ~ Los Angeles
재즈 음반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를 드나들어 보신 분은 아마도 이 음반을 아실 겁니다.
두 장짜리 음반에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지요.


아마 12000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굿(good)'이라는 음반사에서 나왔습니다.
가격이나 기획에 비해 음반의 내용은 참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인데 이 음반에는 그 시대의 대표곡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사실 나는 빌리 홀리데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재즈로 이끈 시발점으로서
혹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애도로서
이 음반을 구입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재즈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낡은 음악이 내게로 가져다 주는 오래된 시간까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 앨범에서의 몇곡을 올려놓습니다.

 

 

 

 

 


 

 

오늘 아침 날씨를 보니 봄날은 저멀리로 아듀 하면서 손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빛과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나를 반기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아주 온통 샛노랗게 익어가는 계절로 성큼 다가서는 걸 보니 문득 반고흐의
씨뿌리는 사람이 생각이 나네요.


화폭의 한가운데 이글거리며 등색의 빛살을 뿜어대던 태양...
그 강렬한 빛살로 땅은 살아 꿈틀대고 생명과 삶의 소리를 내는 듯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 오래된 비망록을 보니 지금은 품절이 되어 절판이 된 아모스 오즈의 <여자를 안다는 것>의
독후감에 이렇게 쓰여있네요. 현대 히브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지금 인터넷을 찾아보니 오픈 마켓에서 1500원에 판매를 하고 있네요.^^*


그녀가 선택한 주제는
<다락방의 수치: 브론테 자매의 작품에 나타나는 성, 사랑, 그리고 돈>이었습니다.
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매일 아침 네타가 학교로 가버리고 나면 이브리나는 재즈나 래그타임 음악을 틀어 놓고
이전 세대의 엄격한 주치의처럼 보이게하는 테없는 사각 안경을 쓰고 램프를 켜고
그리고 한잔의 커피와 함께, 책과 노트들 사이에서 씨름 합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잉크로 찍은 펜으로 열 단어 정도씩 써가는 것에 익숙해져있고.
그녀는 종잇장같이 얇은 피부와 긴 속눈썹에 맑은 눈을 가진 연약하고 부드러운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 즈음에는 반쯤 회색으로 세어 있기는 했지만 어깨 위로 곧게 뻗어 있었습니다.
거의 항상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와 하얀 긴 바지를 입습니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른쪽 새끼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결혼반지 외에는
어떤 보석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손가락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차가웠고
요엘은 맨 살의 등에 갖다 댄 그 차가운 손가락의 느낌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마치 꽁꽁 언 병아리들을 품어 주듯이 자신의 크고 못생긴 손으로 그 손가락들을
꼭 잡아 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세 개의 방으로부터
그리고 닫힌 세 개의 문을 통해서 그녀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상상을
가끔 하곤 했습니다.


때때로 그녀는 일어나서 돌보지 않은 뒤뜰과 높다란 예루살렘의 돌 벽이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잠시 서 있곤 하였습니다. 저녁 무렵엔 방문을 잠그고 오전에 쓰는 것을
지우고 다시 쓰고 1백년 혹은 더 이전의 영어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알기 위하여 여러 사전들을
뒤적이면서 책상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 중략 -


나는 일요일  교회 참석을 위해,
차임벨 소리를  잘들리게 해놓곤 느긋한 게으름속에 하루를 시작합니다.
문뜩 이브리나와 요엘 사이의
세 개의 방으로부터 그리고 닫힌 세 개의 문을 통해서,라는 말들이 맴돌았습니다.
세 개의 방으로부터 그리고 닫힌 세 개의 문을 통해서,
세 개의 방으로부터 그리고 닫힌 세 개의 문을 통해서,
모든 남자가 넘었을지도 모르는 누워있는 세여자의 몸을 그려 보았습니다.
 

세개의 방과 닫힌 세개의문,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을 위해 지불해야하는,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거리일지도 모른일입니다,
세 개의 방으로부터 그리고 닫힌 세 개의 문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앞에 절망하고 사랑앞에 희열 합니다.

 
그녀가 하얀 브라우스를 입고 종잇장 같이 연약한 피부와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여자를 안다고 할수 없습니다. 아직 우리는 그녀의 방 손잡이도 못잡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엘은 여러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한여자도 사랑하지 못했을런지 모를일입니다.
사랑도 봄도 그렇게 끝이나고 있습니다.
 

이제 졸음 섞인 따스한 햇빛이 그리워질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태풍과 끈쩍한 빗줄기만이 나를 반기는 그런 계절이 오고있습니다.
난 여름이 싫습니다. 땀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보는 건 더욱 더 싫습니다.
마치 얼땀계의 황태자처럼 송이송이 포도알처럼 맺힌 땀방울이 싫습니다.
선선한 가을날 가을 사람을 만나 그 가을안에 있고 싶습니다.


세개의 방을 넘을수 있다면 내 사랑도 절망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오늘은 어버이날.. 부모님께 카네이션 한송이는 달아드리셨나요?
혹시 달아드리지 못하고 바쁜 일정에 쫒겨 나오셨다면 전화라도 하셔서 기분을 풀어
드리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픈 마음을 풀어주는 날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처럼 편히 기댈수 있는 여유와 포근함을 가질 수 있는 날이 되셨으면 하구요
사랑의 청량제가 되어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A Lovers Concerto 이라는 곡을 청량음료처럼 내놓습니다.
A lover's Concerto의 원곡은 바흐의 곡으로 그는 자신의 아내인 안나 막딜레나를 위해
작곡했는데, 이곡은 그 곡 중 미뉴엣을 샘플링 한 것으로  처음으로 사라 본(Sarah Vaughan)이
전성기 시절에 녹음한 것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두번째로는 진혜림의 곡이 있는데요.
사라 본의 노래와는 다르게 여린 목소리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고 하지요.
영화로 분류해서 , A Lovers Concerto  라는 곡으로 깊숙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영화적 지식도 별로 없는 터라 조금 느슨한 부분이 있더라고 , 이해해고 양해해 주시길...
 

1.접속의 A Lovers Concerto 
<통신으로의사랑이야 , 접속>
출연 : 한석규 , 전도연 / 감독 : 장윤현
 

먼저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 접속 ' 이라는 영화에서의  A Lovers Concerto 라는 곡은,
그들의 만남의 대한 느낌을 잘 표현해주는 음악이라는대해 별 의견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영화와 OST 가 잘 맞았다는 평을 많이 듣고 있지요.
특히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A Lovers Concerto 는,
그들의 사랑의대한 완성미를 증폭 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라 본(Sarah Vanughan)을 처음 대한 분들은 사라본이 남자인 줄 압니다.
이름이 사라이긴 하지만 남자 목소리가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중저음을 많이 내는 흑인 여가수 입니다. 그녀, 사라 본(Sarah Vanughan)은
마력적인 흑인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불리는 세계의 3대(Ella Fitzgerald, Billie Hoiliday)
보컬 리스트 입니다. 라이브에서 공연은 거의 환상적인 보컬을 뿜어냅니다.
 

아직 한번도 사라본의 공연을 못 본 저로서는....
아주 옛날 콘서트에 가보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의 로맨틱하고 , 부드러운 멜로디의 악기같은 느낌 같다고들 하시드라구요.
이젠 그런 느낌을 맛 보게 될 날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2.친니친니의 A Lovers Concerto
  진혜림(陳慧琳) - Kelly Chen / 애아불애 (愛我不愛)

 

최고의 꽃미남 배우 금성부와 곽부성 그리고 , 가수 출신의 진혜림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 친니친니' 그 영화를 단순하게 배우보기 영화로 생각하면 금물! 
이 친니친니라는 영화를 매력적인 요소로 만들어준 음악이있었으니, 바로  A Lovers Concerto 입니다.

 
친니친니의 A Lovers Concerto는, 여주인공 목만이(진혜림)가 유목연(곽부성)에게 고백할때
쓰는 사랑의 도구로 이용되는데요. 마지막 부분 , 감동적인 키스씬때에도 아주 멋지게 흘러나오는 곡 입니다.
이 점에서 ' 접속 '과 매우 흡사하죠 ; 앗 , 여기서 가이(금성부)얘기도 해줘야지요.
그가 먼저 목만이(진혜림)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목연(곽부성)에게 인도해줬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멋집니다.

 

 

A Lovers Concerto 라는 곡은 , 영화의 끝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 본(Sarah Vanughan)이 로맨스를 추구했다면,진혜림은 깔끔하고 여성스러운 부분을
추구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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