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흐려진 잿빛 속 하늘은 맞물려 휘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퇴근시간이 지났음에도 계속 내리고 어둠이 둔중한
종소리처럼 잠겨들기 시작합니다.


밖의 바람결은  약해졌는데 내안의 바람은 더욱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내 머리칼을 쥐어 뜯고 싶을만큼 아주 고약한 일 하나가 풀리지 않고 나를 채찍질 합니다.


다음주 수요일 10여개 업체의 경쟁 입찰을 앞두고 기획서 하나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워낙 짧은 5분안에 프리젠테이션을 마쳐야 하다보니 무얼 얘기해 설득 할 수 있을까

이런일에 익숙치 않은 나로서는 참 힘이 드네요.


늘 장황하게 설명하고, 논리적인 전략바탕의 기획서만 쓰다보니
어찌해도 5분이 넘어가는 브리핑 자료가 만들어 지는데 후련한 느낌이 하나도 안드는군요.
이러다보니 바깥날씨와 나의 울적한 마음이 음침한 흔들림으로 바뀌게 되네요.


어둠과 빛이 분화되는 표정없는 얼굴이 되어 적막함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같은날은 아무것도 가로막히지않는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찾을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우선인데 그와 반대로 성격탓인가 봅니다..

자꾸 잿빛 분화속에 나를 자꾸 밀어넣게 되는군요.


걸음을 멈추고 앉을 곳을 찾았으나 끈끈하고 습기찬 회색의 망상이 복잡하게
인도를 합니다. 고독스러움과 쓸쓸함.. 오뇌와 비탄의 끔찍한 중량을 몸에 담고
한참을 마음의 문에 주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나의 감정 처소에 두려움없이 심성의 자제를 조금씩 배워갈 수 있다면
오늘의 이 뜨거움 고독과 빼앗지 못 할 진실의 외로움을 치유받을 수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우매하거나 몰염치 하지않으면 아프고 감당하지 못할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갑자기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 작곡가의 인생도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차이코프스키 인생은 바람에 섞여 연기처럼 어둠이 서려진 지친 삶이 아니였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자살일까 ?
콜라라에 의한 죽음일까 ?
현재 결론이 안난 문제이긴 하지만
자살설이 대두되는 이유는 그의 동성애 기질이 공개될까봐서일까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백조의 노래

(7번 교향곡은  미완성 초고를 토대로  후세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 에

남자 백조를 출연시킨 유명한 메튜본의 발레 는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의한 자살을 했을거라는 것을 염두하고 연출한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차이코프스키가 두려워해 자살을 택했다는 것과  비창이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될 것이라고
그가 말한것을 염두한 설이 설득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어쨋거나 그의 죽음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그에게있어 인생은
꺼져버린 갈망과 비탄의 연속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여러가지 삶의 비화나 뒷이야기는 인터넷을 찾아보면
너무도 상세히 나와있어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이 공유할 비창은 말러의 영향을 받아 쓴 곡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음하는 서두와 애절한 비창의 주제,
이어지는 절망적인 투쟁으로 치닫는 제1악장,
러시아 민요조의 소박한 제2악장,
반항적인 투쟁이 전개되는 제3악장,
비통한 탄식과 절망이 도도히 흐르는 아다지오 라멘토소의 제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먼저 아다지오의 무겁고 불길한 서주가 바순과 저현으로 꿈틀거리며 머리를 쳐듭니다.
고뇌를 강조하는 압도적인 제 1주제, 2주제는 장조지만 지극히 슬프고 나약한 환상이
가득한 악장으로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스머프의 만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 멜로디를 기억하실 수 있을겁니다.
스머프는 제가 딱따구리와 함께 가장 즐겨 본 만화로 전 아지라엘을  너무 좋아했고
가가멜이 꼭 스머프를 잡아먹는 것이 성공하기를 무척 빌며 만화를 시청했답니다.


그때마다 꼭 제  기대는 무너졌지만. 하여간 제  어린 시절에는  만화의 권선징악적인
주제에 반감을 가져  악이 가끔 승리하기를 바라고는 했답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잘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전 이 제 2주제를 지금도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 선율에 도취되어 결코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분은 그러나 이 교향곡을 듣다 보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선율이 취해버린 사람에게는 전개부의 최강주가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할것이기 때문이랍니다.
투쟁적인 전개부가 끝나면 다시 2주제가 나타나고 곡은 조용히 어둠속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답니다.


첼로의 우아한 선율이 돋보이는 악장으로 가분수 박자의 영향인지
불안정한 느낌이 드는 2악장입니다.  우아함과 달콤한 슬픔이 닫혀진 마음의 방파제를
조금씩 녹이는 악장인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적인 질주의 악장으로
눈부신 박력이 넘치는 행진곡으로 느린 4악장의 절망에 대한 일종의 반항처럼 들리는 3악장


탄식과 인생의 절망에 대한 슬픈 관조로 중간부분의 백조의 마지막 노래처럼
슬픔의 폭발 후 곡은  서서히 죽음의 강 저편으로 저무는 석양처럼 사라져 버리고
이 곡은 드디어 막을 내린답니다.


워낙 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습니다.
누구의 것으로 들으면 가장 완벽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마에스트로 첼리비다케가 이렇게 말했다죠?
오케스트라는 신비고 하나의 악기라고 누가 지휘봉을 잡는가에 따라 사운드가
천차만별 달라질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말이 정답인듯 합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아니 마음을통해 음악이 가지는 그 작곡자가가지는 의미를
형상화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지휘자의 역활이야 말로  오케스트라의 전부가  아닐수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푸르트뱅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정평이 나있지만 오늘은 카라얀과 비엔나 필 하모닉 연주 음반으로 권하고 싶네요


카라얀은 후기낭만주의 음악에 장기를 가진 지휘자답게 음악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서구적인 어법으로 기량이 탄탄한 사운드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녹음을 남기고 있으나 해석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다 들어보질 못해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글을 마치며 이 곡은 우울증의 치료에 좋다는 곡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슬픈 곡을 먼저 들려주고 서서히 상태가 호전되면
점차 밝은 곡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 밝은 곡을 처음에 접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답니다.
음악을 사람의 마음과 맞추는 동질의 원리가 적용되는게 아닌가 싶네요.


오늘같이 비가오는 밤..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은 한곡의 뮤직에세이로 상심의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올려봅니다.

 

 

SYMPHONY NO.6 in B minor, op. 74 PATHETIQUE
연주
WIENER PHILHARMONIKER
지휘
HERBERT VON KARAJAN

 

 

                                      (2014년 7월26일 현충원 앞 하늘)

 

 

오늘 하늘 잿빛구름은 마치 바람에 찢긴 지연(紙鳶)이 전신주에 매달려
상승과 낙하의 두가지를 못하게 된 것처럼 불투명한 진공속에 방황하는 듯 합니다
어둡고 끈적거리는 수질을 살펴줄 일 없는 오늘,  주말 토요일...


서성이고 기웃거리며 외곽을 도는 일에 시간을 써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에 나와 다음달에 있을 독서모임 발제 책인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읽으면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날의 쓸쓸함은 오히려 감미롭습니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위해 물을 아주 뜨겁게 끓입니다.
차가 식으면 마음이 더 쓸쓸해지는 것 같아 마시다가도 식으면

다시 데워 마시는 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름철 아이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데..
뜨거운 차의 열기가 목구멍으로 내려 갈때 느껴지는 알싸함과,
뜨꺼운 찻잔을 두 손안에 받치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친구는 늘 내게 얘기 합니다.
애정결핍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놈이라구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브람스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도 뮤직에세이에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올려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생 한 여인 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브람스..
타인의 아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브람스..
김남조 시인의 표현을 잠시 빌려보자면 숙명의 창문을 열어 놓고 있는
슬픈가옥같은 사람이 브람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요,
오늘 한 여름 날.. 정말 브람스와는 전혀 맞지않는 계절이지만 날씨가 주는
격렬하고 산란함이 염원처럼 브람스를 찾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어쩌면, 그의 고독과 벌거벗은 진실을 주저없이 얘기 해주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은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어보면 어떨까싶습니다.
브람스 교향곡들은 어느 연주를 들어봐도 실망스러운 연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워낙 곡이 알차서 그렇기도 하고. 브람스 매니아님들 앞에 솔직히 무언가를
소개한다는 것이 웃기는 짬뽕이 되는터라..내가 새로 소개할 건 없는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 교향곡 4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브루너 발터의 음반입니다.
카라얀의 파사칼리아, 클라이버의 3악장 등등..떠오르는 것들은 많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브루노 발터의 교향곡 4번이 듣고 싶네요.


누가 왜냐하고 묻는다면 브루노발터 4번 1악장에서 유난히 강조되어 들리는 트라이앵글
소리가 마치 오헨리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마지막 남아 있는 잎새를 연상시킨다는게

개인적인 이유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교향곡 4번의 이야기를 조금 해본다면.. 많은 전문가분들이 평하시길..
첫번째는 '인생의 가을' 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 브람스의 고독감과 체념이
강하게 표면에 나타나 있다고 하는군요.
두번째로는 지금까지의 어떤 곡보다 한층 고전적인 형식이나 기법에
중심을 주고 있는 점이랍니다.


교향곡 1번과 같이 조금은 어둡고 비극적이거나 2번 교향곡 같이 목가적이고
밝거나 기쁨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1번부터 3번까지의 교향곡과는
다른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건 초짜인 제가 들어도 알것 같긴한데요.


브람스 음악 대개가 우수에 찬 것이지만 교향곡 4번처럼 처음부터 영혼에
깊이 호소하고 고립된 느낌을 준다는것 그것이 다름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그래서 브람스 애호가들에게는 편집광적인 면이 있지않나 싶습니다.
조금은 웃기는 얘기지만 한마디로 잘난 뽕이라는 것인데..


말러를 좋아하는 말러리아, 브람스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대중적인 인기곡이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멜로디나 색채감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어떤 경멸감 같은걸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음악을 듣고 있다는 자랑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단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브람스 음악엔 그만한 특색이 있는 것일까요?
그들만의 병적 취향은 아닌지? 분명 그의 음악에는 그만한 특색이 있습니다.


사진이나 스케치로 보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특색을 짐작하게 만드는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나, 산책을 하고 있는 배불뚝이 그의 모습에서
정열과 중후감을그리고 시류에 편승하지않는 완고함, 자기 자신의 예술에 대한
육중한 확신을 충분히 읽을수 있으며 동시에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독신 남성의
괴팍스러운 면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부르노 발터..
짜임새가 아주 단단하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 느슨함과 비어있는 곳이 없어 보일만큼 잘짜여진 건축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르노 발터만의 특유의 현을 삽입하는 것과 저음부 화성의 음악적 밀도를 높혀
연주를 한다는 점.. 음악보다 운동량을 느끼게 하는 음악같다고나 할까요?
그 운동량은 대하 밑을 흐르는 도도한 물줄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브람스 음악은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도 가벼운 위안을 주는 음악은 아닌듯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과 비애 갈등과 어두운 욕망으로 짓눌려 있을때 우리 내면 깊숙히
가라 앉혔다 그 절망의 심연으로 부터 우리를 다시 솟구치게 하는 그런 음악인 듯 싶습니다.

 

 

 

Symphony n°4 op.98

I. Allegro non troppo 0:00
II. Andante moderato 12:13
III. Allegro giocoso - Poco meno presto - Tempo I 24:22
IV. Allegro energico e passionato - Più allegro 30:29

New York Philharmonic
Bruno Walter
Studio recording, New York, 21.II.1951
.

 

 

방송에서는 태풍이 불어온다고 하는데 아침부터 찌는 더위는 하늘의 깊이를
점점 높이고 뜨거운 햇살이 기름처럼 흘러내립니다.
누군가는 神을 잃어버린 계절이라하여 싫다고 했는데 그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내게는 땀흘리는 계절이라 더욱 싫습니다.


산다는 일, 끝없는 층계를 밟아가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삶이 하나의 괴로움이고, 탐욕이고 건조하다 하여도 견뎌내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오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입찰을 위해 광고주 미팅을 하러 가는 도중
베토벤에게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카를 리히노프스키 후작에게
헌정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8번 2악장 비창 곡이 흘러나오는데 그 느린 악장의
소나타는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아마도 체르니 40번쯤 치면 이 비창 곡을 틀리지않게 치기위해 손가락을
쥐나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피아노를 못치니 정확한 것을
알길이 없지만 이 비창 소나타는 다른 영화나 광고 배경음악으로 리메이크도
많이 되어 클래식을 조금만 들어 본 사람들은 친근한 악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로 흘러나오는데 연주자의 무게감
때문인지 너무도 비장하고 위력적인 에너지가 듣는 내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베토벤의 젊은날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음악을 들어도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말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전곡에 관해 가장 뛰어난 연주자가
누구냐고 물어 본다면 아무 생각없이 저는 알프레도 브렌델의 연주를 꼽고 싶습니다.

베토벤의 고전적인 정서와 느린 악장에서의 비장한 아름다움을 잘살려주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두드러진 존재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연인과의 이별후 그 시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내러티브하게 표현하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센시티브함과 베토벤의 삶의 고난과 아픔, 그리고 베토벤의 사랑과 이별 ,
그안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외로움, 그리고 연인에대한 그리움의 호흡을
마음껏 내뱉는 연주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올려드리는 유투브 영상을 보시면 그의 표정이 압권일 것입니다
갑자기 들춰내기 싫은 내 작은 사랑의 다큐멘타리가 떠올려지면서
사랑하던 여인을 떠나보냈던 그 아픈 기억이 새삼 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나를 괴롭힙니다.

 

사실 이별의 음악으로는...
쇼팽 피아노 연습곡 작품 10의 제3번 이별의 곡이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3중주곡 제1번 엘레지, 그리그 모음곡 제1번 제2곡 ‘오제의 죽음등이
이별의 아픔을 대변하는 곡들인데 왜 나만 유독 비창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아파야 사랑입니다.
특히 끝나가는 사랑을 느끼는 일은, 그 이후의 생 전부를 사무치게하는
치명적 통증이라 생각이 듭니다,. 처음의 달콤한 아픔과, 그 이후의 검질긴
집착과 아픔, 그 모두를 되짚으며, 결국 가장 깊은 사막으로 떠밀려 유영하는
그런것이 이별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이별이란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 아픔과 깨달음의 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상대방인들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픔의 봉지에 싼, 한알의 사탕을 다시 깨물수 있다면 그래서 견딜 수 있다면
견뎌내야 하는 것이 영혼의 허기를 면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베토벤이 작곡한 32개 피아노 소나타 중에 3대 피아노 소나타라 칭해지는 비창,
자신의 영혼속에 내재되어있던 음악적 아이디어와 기술적 방법을 얹쳐놓은 듯한 

비극적 강렬함, 이런것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피아노 소나타가 비창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둡고 극적인 표현이 폭풍같은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멜로디가
처연함을 더하는 동화적이고 우울한 느낌이 염세적인 아픔을 더하는것 같았습니다.


한참 더운 여름날, 생활의 대립일 수도 있는 무겁고 고독한 곡을 선정하여
뮤직에세이로 쓴다는 것이 아픔이지만 내게 가만가만 속삭이는 현실속 아픔을
비창이라는 곡이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내 기억의 한페이지를 마감하고자 써봅니다.

 

요즘 같아서는 여름날 소낙비처럼 여름 장마처럼 펑펑거리고 율고 싶을때가 많았는데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음악이 내 눈물의 작은 형벌을 대신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울음은 웃음보다 값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웃음과 함께 울음도 함께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하나님께서 웃음보다 울음을 더 많이 채워주신것 같습니다

그것은 울수 있음으로 더욱 살고 싶어지게 하는거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이별 후 오는 아픔의 눈물은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 살고 싶습니다... 살고싶다는 간절함이 오늘 뮤직에세이의 감성을 끌어냅니다.

 

붏행히도 죄송합니다.

유투브에서 이 음악을 올려놓은 사람이 타 사이트에서는 공개하기를 거부했네요.

직접 유투브에서 들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네요

영상으로는 안되어 있지만 알프레도의 연주를 들어보시죠


Beethoven “Piano Sonata No 8 in C minor Op 13 ‘Pathétique’” Alfred Brendel, 1962 64

1. Grave-Allegro di molto e con brio

2 . Adagio cantabile

3. Rondo Allegro

1. Grave-Allegro di molto e con brio

Alfred Brendel, Piano

하단부에  img.catholic.or.kr 열기를 클릭하셔요

 

2악장 Adagio cantabile

 

3악장 Rondo Allegro

 

 

 

제가 다음 뮤직에서 알프레도 브렌델 피아노 연주하는 걸 구매 했는데도 불구하고 올려지지 않네요..

엄청 열받네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들었던 다니엘 바렌보임 연주하는걸로 대체해서 올려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소유자 : baronffreak ]

 

 

 

[ 소유자 : baronffreak ]

 

 

 

 

 

 

글을 시작하며...
사람의 만남이 모두 우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땅 속의 보리라 할지라도 회춘의 기약 앞에 내놓는 무진 인고의
값비싼 봉헌인 점을 감안 한다면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연하지 않는 인연을 통해, 꽃을 피우고 행복을 만들고 누락없는 질서를
지키려햇지만 이별이란 생명은 마치 잠시동안 침몰해버리는 배와같이
허술하게도 부스러기와함께 상실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떠나가는자의 아스라함과..
남겨진 자의 상실감...
자신들의 유한한 마음을 내어 주었던 사랑과 정열이 헌신의 욕구앞에
인색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때문이였을까 되돌아 보게됩니다.


상실에 있어서 매번 과민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새벽부터 일찍 잠을 깨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아프다 생각이 드는것이 마음에 조갈을 가져오게 합니다.
아프면 안돼는데, 컨디션 조절을 간신히 하고 사무실로 나왔습니다.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말 딱 맞는말 입니다.
광고주와의 미팅이 갑자기 오후로 변경되었다고 연락이 오네요.
할일이 없어져 그런지 내마음이 방황을 합니다. 이것 또한 상실감 입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립니다.
잠시라도 통화를 해볼까 아니 메세지라도 보내볼까?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니 마음이 짠한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저는 요즘 점점 눈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뭔가 슬픈일이 생기거나, 뭔가 음악이 저를 자극하는 순간에는
갑자기 눈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출근하면서 슈베르트의 소나타 21번 2악장을 듣다가 선율이 슬프게
들려서 울컥하는 것이 울고 싶지않아 음악을 꺼버렸습니다.


베토벤으로 음악을 다시 바꿨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정력적이고 충동적인 그의 기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여인들을 충동적으로 좋아했지만 자신만의 강한 기질과 자기중심적인
경향은 그를 누구와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못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5월의 첫날부터 눈물로 시작해서는 안되겠지요.
5월 첫날의 시작은 슈만과 함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볼 생각입니다.
내 영혼의 고독한 안개를 걷히게 해 줄 과거의 추억만들기..
그안에서 좌절도 소망도 깨우치도록 노력할까 합니다.
 

아마도 이런 것이 너그러운 낭만일테고, 무형으로 남겨진 소중스러움을
문 닫지 아니하고, 암울해하지않고 목마르게 부르는 이름으로 남길수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 영혼을 맨 먼저 찾아주신 분은 나의 하나님이셨지만 내가 고뇌의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아마도 푸념의 글이나마 쓸 수있게 한

소중한 공간인 블러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뮤직에세이 코너를 가장 사랑해주시는 친구이신 빛마루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슈만은 워낙 유명한 작곡가이다보니 구구절절은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1810년 독일 출생의 작곡가입니다. 어릴때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열심히 연습을 하다

손가락을 다치고 대학에서는 법률을 전공한 인물로 장인과의 소송을 통해서

클라라를 얻은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상당히 아름답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딸을 대대로 정신질환을 가진 가난한 음악가에게
시집을 보내는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버지라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장인 비크는 혼자 클라라를 키우면서 클라라에게 아낌없이 지원을 했던 사람입니다.
슈만의 주요 작품중에 비중있는 작품들은 몇몇의 피아노곡들 , 교향곡 4곡, 첼로협주곡,
피아노협주곡, 가곡들입니다.


오늘은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이라는 표제가 붙은 곡을 가지고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이 작품은 1841년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한 다음해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의 인생의 청춘기를 묘사하듯 활기찬 시상이 전곡을 지배하는 곡입니다.

이 곡의 탄생 배경이나 기타 궁금한 것은 인터넷을 참조 하세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의 배경과 중심 음악들을 올려놨네요.


슈만의 음악에서 제가 느낀 그의 핵심적인 기질은 시인의 기질입니다.
특히 그의 시적인 기질은 이 교향곡의 2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슈만의 관현악법은 베토벤의 수법을 모방했고, 총주로 일관하고 전체적으로
엉성한 면이 많이 보이지만 (독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인 모차르트 , 베토벤 , 브람스
등에 비하면 ) 그의 시적인 선율 미학은 이러한 단점을 커버해주고 있습니다.


교양있는 음악가라면 라파엘로의 그림을 분석해봐야 하고
화가라면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공부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가는 시를 그림으로 바꾸고 음악가는 그림에 음악성을 부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슈만의 시각은..
그림과 문학, 음악이 하나의 통합적 개념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개인적인 생각이니 깊이 생각지 마시구요. 실제로 슈만은 평론가로도 유명했던 인물로
음악가중에서 굉장히 교양이 있는 인물로 정평이 있던 사람이였습니다.
시인을 꿈꿨던 문학청년, 시인 하이네와의 교분도 멋진 일화를 남겨 주고 있습니다.


교향곡 1번 봄을 표현하는데 있어 멋진 곡을 선보인 음반들을 보면...


푸르트벵글러 데카 빈 필 1951 작품이 있습니다.


제가 푸르트벵글러 팬이다보니 어쩔수가 없네요. 이해해주시길.. ㅋㅋ
모노시절의 연주지만 이 작품의 대표적인 명 연주로 독일 낭만주의의 화신
푸르트벵글러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돼는 연주입니다.
특히 3악장의 스케르쬬의 정력적인 힘의 분출은 결코 아무 지휘자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사운드입니다.


자발리슈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라 1972 EMI  음반도 명반으로 꼽을 수 있지요


스테레오 시대의 명 연으로 대표적이 자발리슈의 명 연주입니다.
약동하는 젊음의 추진력이 제대로 발휘된 연주로 가장 무난하게 레퍼런스급으로
추천해 줄 수 있는 연주입니다.


클렘페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MI  음반도 있습니다.


우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추진력 있게 힘으로 밀어부치는 연주입니다.
슈만이 가진 엉성한 관현악 수법을 추진력과 힘으로 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드는 연주입니다.
이 연주 역시 꼭 들어볼만한 명 연주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빈 필하모닉, 1984, DG. 음반이 오늘 같이 할 음반입니다.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4.03.10 자 글을 보면...
슈만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한 음반 중에서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음반이라고 나옵니다.
봄의 느낌을 완연한 느끼게 해석을 한 곡이 번스타인이고. 출렁거리는 연주, 화사한 색감이
진하게 느껴진다고 평론을 써놨습니다.


말하자면 번스타인 스타일로 밝게 채색된 ‘봄’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지하고 또 다른 이들은 불편해한다고 하네요.
하지만 특유의 리드미컬한 지휘로 봄날의 약동감을 구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번스타인과 빈 필하모닉의 이 녹음이야말로 추천 1순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4월은 꽃을 피우는 봄의 향연이였다면 5월은 봄을 완성시키는 녹음 우거진 달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에도 또 다른 봄이 올것이고 녹음 우거진 날도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그 봄을 알리는 구세주는 클라라 슈만 같은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부터가 아닐까 싶네요. ㅎㅎ
나는 그 구세주를 내 몸보다 더 좋아해줄 것이라는 마음 가득한 애드벌룬을 띄워봅니다


늘 그래왔지만 ....
사랑할때 기도하고 사랑이 간 후에도 기도를 합니다.
따라서 언제나 사랑때문에 기도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정신의 벌거벗은 진실을 숨길 까닭은 없습니다.
정직은 가장 상쾌한 정신 위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 드리고 싶습니다.


쏴...
물을 뿌리듯이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5월 슈만 교향곡 1번 봄과 함께..
흐늑흐늑 비누처럼 풀려진 뽀얀 거품을 일구어 내 사념의 섬약한 살결을 어루만져 주고 싶습니다.
나는 날마다 운명을 결정하고 날마다 비수에 찔리지만 심성의 방황이 나의 병임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주무시고 나는 땅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자애를 베풀어 주길 기도합니다.

 

Schumann, Symphony No.1 Op.38 'Spring'

 

 

 

 

 

 

 

 


 

 

 

2월도 벌써 한 주만 지나면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이 되겠지요?
특별한 이벤트도 서스펜스한 드라마 같은 일들도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일을 하느라 그냥 저냥 지내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은데
솔직히 양심에 찔려서, 그렇게 일도 바쁘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허당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위선을 떨며 바쁘다 하고 삽니다.


그래서인지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2월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광고주와 선약은 되어있는데 점심식사를 같이 할 만큼 절친한 상태가 아니어서
식사하자고 먼저 말하기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약속만 정해놓고 사무실에 앉아
지금은 찾아 가보지도 않는 카페, 한참 때는 자주 찾고 사람들도 만났던 카페에

들어가보니 제가 쓴 정말 오래된 글 하나가 있네요. ㅎㅎ 이런 것을 대박이라고 합니까?

 
그래서 이 글을 뮤직에세이에 그대로 들고 와 옮겨봅니다.
아마 그때 음악을 같이 듣던 분들과 교류를 많이 하던 시절이었나 봅니다 
오늘 왠지 한번쯤 다시 찾아보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바로 스탠다드 재즈 입니다.

스탠다드 재즈하면 전형적인 재즈라기 보다는 재즈화된 팝이라고나 할까요?

 

오늘은 이런 스탠다는 재즈 곡 중에 하나를 뮤직에세이에 올려볼까 합니다. 
이 곡을 떠올리면, 아니 솔직히 말씀 드려 험프리 보카트가 먼저인지 이 곡이 먼저인지
구분할 수 없게 엉켜져있는 추억이 뭉터기로 저한테 다가옵니다. 
 

My one and only Love 혹은 Misty 같은 곡들은 영화와 연결시켜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이 곡은 뭐 굳이 연결 자체가 필요 없는 일체형입니다.
특히 저같이 흑백 TV를 보며 자라온 세대들에게는 더욱 더 깊은 추억을 느끼게 하지요.

 
깃 넓은 회색 바바리와 중절모,
짧은 말보로 담배는 여러 터프가이들의 스탠다드 심볼이되 버렸지만,
1942년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만 하더라도 [말타의 매(Maltese Falcon, 41, 존 휴스턴)]의
스페이드 (영화속 험프리 보가트가 분한 사립탐정)를 위한 준비물이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가끔 EBS에서 방영되곤 하는 [카사블랑카] 에서도 잉그릿드 버그만
(아무리 봐도 이렇게 유니버설 하게 아름다운 여인은 찾기 힘들다는 게 제 생각^^) 이라는
역시 불세출의 스타와 함께 역시 그 모습 그대로 출연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로망을 만들어 버렸죠.


많은 분들이 영화 속에 흘러나왔던 멜로디를 입술로 기억하면서도
제목은 떠올리지 못하시는 곡이 바로 이 곡 'As Time Goes By'입니다
제가 본지가 좀 오래돼서 영화 전체에 대한 기억은 흐릿합니다만,


아마 극중 보가트가 운영하는 클럽으로 찾아온,
그러나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 버린 잉그릿드를 만났을 때 클럽의

흑인 피아니스트 샘이 연주했던 곡이 바로 이 곡일 겁니다.

 

그리곤 보가트는 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don't play it again, Sam.."

 

저에게 이 곡은 그 어떤 명 보컬과 연주보다도 Chet Baker로 남아있습니다.
어느 분께 일전에 이야기 했던것인데 ....


담배연기 가득 찬 칙칙한 바에서 우울하게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소리처럼....
Jazz를 인식하고 즐기고 있었을 때 만난, Chet Baker의 이 곡은
'my funny valentine'을 밀어내 버리고 해가 지고 혼자 남을 때면 틀어놓는
침잠모드의 시작 곡같이 되 버렸습니다.


사실 이 곡의 멜로디가 너무나 유려하고 단조 풍의 흐름이 어느 정도 애상을
자아내기 하지만, Chet Baker 만큼의 비장 감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어찌 보면 과도한 감상이라고 할까요? ㅎㅎ.


개인적인 선호도를 기준해서 권해드린다면 ...

최우선적으로 Sonny Stitt 의 연주를 꼽고 싶습니다.
As Time Goes By 를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했을 것이라 생각을 하시겠지만

실상 찾아보면 아주 적습니다.

 

7개의 연주가 있는데 각자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어 등록된 연주가 적은 수임에도
즐겁게 비교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중 Sonny의 연주는 다른 곡들이 이모셔널한 감상 이입에
중심을 많이 둔 반면, 일단 힘을 쫙 빼고 멜로디를 타면서 약간의 임프로를 즐길 수 있는
정석적인 단순함이 오히려 연주를 차별화시켜 귀에 달라붙게 만들고 오직 그 연주 자체만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연주를 해도 As Time Goes By 곡은 좀 색채가 진하지 않은
무채색 같은 연주라고 느껴집니다.
한번 들어 보시면 옛일을 떠올리며 따뜻함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드네요

 

영화 카사브람카 OST



Sonny Stitt (ts,as), Walter Davis (p), George Duvivier (b), Jimmy Cobb (ds)

Sonny Stitt Quartet - As Time Goes By
Album:Sonny Stitt / The Last Sessions"
Recorded:New York City, June 9,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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