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가 말한다.


"사람이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사랑조차)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보다 더한 것은 떠나보낸...이 아니라,
떠나간 사람이 그 이후로도 어떻게든 관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에 시시때때로 그 사람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그런 척,
또는 일부러 그렇지 않은 척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한 개인의 행동에 관여하는 어떤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눈금은 분명하면서도 믿음이 잘 안가는 저울처럼 느껴진다.


요즘 관심이 있는 인물들은 모두 사후에 인정받은 이들이다.
천재라는 신의 축복은 당대의 외면을 담보로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은 날이 춥기도하고 일정에 문제도 생기고 제대로 뭔가 풀리지를
않는 듯 하여 잠깐 클라이언트 사무실에 다녀오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본것 같다,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이 책은 두 노인이 만나 하룻밤 사이 대화하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다.
그 대화 속에 두 사람 평생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증오가 깃들여 있다.


어느날 갑자기 정말 절친했던 친구가 찾아와,
잊었던 저 마음 깊은 곳에 감쳐놨던 운명같은 사랑..
그 열정을 다시금 되살리게 한다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전개 되지 않는다.


단지, 40년만에 찾아온 친구는 주인공의 마음속 깊이 꾸깃꾸깃 감쳐놨던
그 소중한 열정에 불을 짖피고 다시 고통스럽게 하는 작은 대화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에 힘을 실으려면 압축하고 제한하라고 했던가.
이 책에는 그네들의 일생이 단 하룻밤 사이로 압축되어 있고 그네들이
거쳐간 세계 역시 외딴 성의 골방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 그리고 나와 같지 않은 부류의 사람,
얼핏 너무 이분법적인 분류로 볼 수 있지만 나는 이 분류가 맞다고 본다.


통하는 사람과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통하지 않는 사람과 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통하는 사람을 하나 더 찾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헨릭과 콘라드는, 또는 헨릭과 크리스티나는
너무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바로 거기에 비극이 있지 않았을까?


보통 괜찮은 책 한 권을 손에 넣으면
그 책 속에 곱씹어볼만한 문장이 몇 개씩 자리하기 마련이다.
따로 적어놓고 싶은, 또는 암기하고 싶은...


거짓말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그런 문장을 거의 매 장마다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얇은 책이지만 간단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고,
한 번 손에 쥐면 쉽사리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이 책의 제목인 열정, 또는 정열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열정이라는 것은 신이 주신 선물은 아니라고.


그것은 인간이 악마로부터 빌어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열정을 빌어 쓰고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막대한 채무로 인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면을 보이게 되는 거라고.


그럼에도 내 삶에는 열정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잘 쓰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또 많은 숙제를 남겨준 소설이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책속에서)

 

 

미국의 작가인 ‘F.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발표한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이있다.
5년이 조금 넘은 걸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알바글을 한참 날릴때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놀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남들도 다읽고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마치 나도 이 소설은 늘 읽은것 같은
기분으로 살다가 뭐 읽을만한 얘기 거리 좀 써보라는 후배 닥달에 정작 읽지 않고 있던
위대한 갯츠비책을 알바 글 쓰면서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위대한 시작 위대한 겟츠비란 제목의 거창한 글을 읽다보니 생각이 엉뚱한데 미쳐
갯츠비 뒤집어보기 식의 글을 썼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 그 사이트에 들어 오던
사람들에게 호응을 많이 얻지는 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블러그에 새로운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를 않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매번 새로운 글을 쓴다는것이 전문 작가도 아닌데 버거운지라

내 글목록에 남아있는 상처뿐인 글을 홀라당 벗고 캡쳐해서 올려보려 한다.


하루키가 직접 번역한 이 작품은 한때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적이 있었다.
하루키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글을 쓰던 당시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든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거나,
양장본 하드커버로 재판이 나올정도로 인기가 있어 사람들 눈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이 소설이 꽤나 많이 읽혀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블러그 친구분들은 어떠신가?
나처럼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영화에 나오다보니 마치 읽은것처럼 환영이 어리고
내용도 다알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줄줄 말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니라구~~ 아님말구... 어쨋거나 각설하고...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향락이 넘치는 1920년대의 미국사회를 잘 표현한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실은 이 책 역시 고전문학 작품들처럼 ‘읽히지 않은 도서관’ 목록에 모셔져 있던 책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하루키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독서량이 워낙 많은 분들에 의해 일찍이 읽혀졌던 책이기도하다.


혹시 안본 사람들을 위해 작품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한 주인공의 옆집에 있는 대저택에서는 매주 엄청난
파티가 벌어진다. 그곳에서는 뉴욕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저택의 주인인 ‘개츠비’씨가 제공하는 향락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정작 파티의 주최자인 개츠비씨는 베일에 가려져있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흉흉한 소문들을 퍼트리고 떠들어대지만,
정작 진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실은 그의 부는 범죄를 통해서 축적된 것이다.


그리고 그 떠들썩한 파티는 자신이 사랑했으나,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는 ‘데이지’라는 여인을 찾기 위한 것이다.
개츠비는 결국 데이지를 만나지만, 그녀의 남편에 의해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가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려다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데이지의 남편의 귀띔을 받고 온 희생자
(이 사람은 데이지남편의 정부이기도 했다)의 남편에게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다.


주인공에 의해 치러진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그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주인공과 또 다른 한사람만이 쓸쓸하게 개츠비의 최후를 배웅한다.
 

난데없이 재미있는 글을 쓰라고 내게 종용했던 후배의 의견을 무시하고 문학 이야기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무언가’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통상적인 평에서, 개츠비는 순수하지 않은 시대에의해 파멸한 순수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결국에는 자신을 배신한 그녀의 몫의 죽음까지
감내한 이 사람을 일컬어, 작품의 저자는 아마도 일말의 의심 없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씨는 과연 위대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그는 ‘데이지’를 정말로 ‘사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Oh! My Dear 데이지...
데이지는 개츠비가 실현하고자하는 ‘이상’이다.
배금주의와 향락만이 넘쳐나는 미국에서, 개츠비는 ‘사랑’이라는 지고지순한
이상향을 실현시키기 위해 밀주를 만들고, 사기를 치고, 돈을 벌고, 거대한 저택에서
매일같이 파티를 한다.


개츠비가 하는 일들은 타락한 이들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정작 그는 쾌락에 휘말리지 않고 데이지라는 이상향을 향한 발걸음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개츠비의 낙원이자, 그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수이며,
그의 과거인 데이지는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멈춰있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세상이 여자에게 원하는 것을 알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고,
안락함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츠비의 데이지는 자신의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 소녀였지만,
지금의 데이지는 자신의 딸이 ‘예쁘고 귀여운 바보’이길 기원하는 여자다.
개츠비가 일생을 바쳐가며 꿈꿔온 데이지와 현실의 데이지를 과연 ‘같은’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실은 개츠비의 데이지는 현재의 데이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개츠비의 과거 속에서 멈춰있는 화석이며,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개츠비라는 인간의 존재이유를 위해서이다.
개츠비의 데이지는 숨쉬고, 변화하며, 존재하는 데이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데이지에게 투영된 개츠비 자신이다.


그가 변화한 데이지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떨쳐내지 못한 것,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자신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공표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그녀를 포기하는 것은 곧 그녀를 얻기 위해 바친
자신의 세월을 포기하는 것, 나아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하고싶다.
오히려 그의 세계 안에서 데이지는 움직이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는 ‘객체’이며, ‘타자’일뿐, 개츠비의 사랑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순간 바로 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데이지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고통을, 사랑을 가지고 숨을 쉬며 변화해가는 ‘존재’다.
개츠비가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화려한 파티도, 범죄도, 황량한 종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으려 했고,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인 데이지는 더 이상
개츠비가 만들어 놓은 퍼즐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
항상 이렇게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개츠비씨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곤 한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 혹은 그에 대한 느낌은 때때로
분노와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체 그 자리를 정하는 사람은 누굴까?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그 사람에 대한 분노는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


인간은 그것이 나를 배신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의 발로일 뿐이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종의 원칙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 ‘존재하는 것들’의 의사를 물어보거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었을까? 침묵과 동의는 분명히 다르다.
오로지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 아니 인간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자기 편한대로 정해버린 자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걸까?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인간 vs 비인간의 영역에서만 등장하는 문제들이 아니다.
자식의 자리, 부모의 자리, 여성의 자리, 가난한 자의 자리...
인간사이의 관계에서도 ‘그가 있어야할 곳’에 대한 기준은 엄정하다. 
나 혹은 사회는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단지 ‘거기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라벨이 붙어있는 서랍 속에 차곡차곡 분류해낸다.
서랍 속에는 단지 ‘분류된 것’들이 존재할 뿐, 인간은 없다.


대체 내가 보고 있는 저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에 앞서서 나는 ‘무엇’을 통해 보고 있는 걸까?
나의 눈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정해놓은 어떤 이의 눈인가?

 
제2의 성...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타자성의 내면화를 통해
‘여성’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통해 게츠비씨의 시선은
이제 데이지의 내부에 자리한다. 두 개의 시선이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남자의 눈을 정상 혹은 기준으로 설정해놓은 사회의 시선하나,
그리고 그녀의 내면에서 사회의 기준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외로운 시선 하나. 여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마저도 타자의 시선을 적용한다.


거울을 보며 ‘완성’시키는 그녀들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똑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길을 걸어도,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집요하게
추적한다. 어쩌면 이 사회가 제공하는 선택은 꽤나 극단적이다.


타자성을 받아들이거나, ‘이상한 년’이 되거나, 아니면 그 경계에서 고뇌하거나.
남성들의 문화 속에서 여성은, 정복의 대상이거나, 회귀하고 싶은 자궁이거나,
'비밀스러운 무엇이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여성은 그저 돈 주고 사먹는 ‘보지다.라는
사고를 가진 정말 우스꽝스런 남자들도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들이 딱히 그 사람들의 현재나 미래에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예전에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발견한 한 기사에서는 기혼여성을 상대로 한
성매매찬반 설문조사가 있었고, 그 도표위에 노란머리의 성판매여성이 성매매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언니’들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고 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어느 ‘비뇨기과’의 제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희귀한’조합은 아무리 봐도 성 판매여성들의 권익과 인권을 위해서 힘쓰는
어느 비뇨기과원장님의 고군분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희귀한 모습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꽤나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다.
타인의 얼굴 인간들은 굳건한 자아를 얻음과 동시에 도무지 무너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벽도 동시에 만들었다. 그 벽은 다른 이들을 타자로 만들고, 지배함으로서 더더욱 굳건해진다.


이 타자들은 오로지 주체의 완전무결함을 입증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것 들일뿐,
전혀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지난 세월동안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말하라는 개츠비에게,
오직 한순간 일지라도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해, 실은 잃어버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데이지는 하나의 주체로서 ‘살고’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배신’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으며, 그 결과까지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제멋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오로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았으며,
그것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츠비보다도 더욱더 주체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중년들이 즐겨듣던
심수봉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노랫말이 생각난다.


언젠가 말했듯이 노예제의 역설은 결국 그 주인이 노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망각 한 채, 누군가를 객체로, 타자로 놓아두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그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마저도 너무나 낯선 타자로, 객체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결국 소통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
너무나도 낮선 타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에 뒷 내용이 너무나 궁금해서,
잠이 오는 것을 참아가며 밤새 봤던 책이다.
그 후 상세한 내용은 머리에서 잊어졌고,
아주 대단한 책이였다라는 기억만 가지고있었다.


그리고, 그 책을 오늘 몇년 만에 다시 보게 됐다.
하루종일 몸살 감기로 컨디션은 엉망진창이였고
나를 누군가 아는척해주는 것 조차 귀찮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말을 늘어지게 하는것 보다는 조용히 사무실 책상앞에

앉아 할 일이라곤 책을 보는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난립하는 요즘 출판되는 책 중에 인간관계라는게 무엇이냐?

인간관계 잘하게 해주는 책이라  설명하면 딱일 것 같다,
즉 인간관계와 리더쉽에 관한 책이다. 자기 계발서나 인간관계에 관한

누구나 알고있는것, 누구나 알고 싶은 것을 아주 쉽게 풀어쓴 책이 아닌가 싶다.

 

인간관계라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기 맘대로 누군가를 사귈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의 존재도 인정을해야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깨닭아야 한다는 그원칙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자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자기 존재의 궁시렁 거림을
뒷담화로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하다, 내가 이책이 좋다는 이유중 하나는...
다른 자기 계발서와 차별점을 말한다면 상대방을 움직이고 이끄는 리더쉽을 얘기하는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깨닭게하는 리더쉽이라는 점이다.


최근에 'NOW" 라는 책을 읽으면서,
스님 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 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 책이라 말하고싶다,
 

옳고 그른 것은 존재한다.
예를들어  빛이 소리보다 빠른 것은 자연현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천둥, 번개) 그래서, 내가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내가 옳다' 라고 말할때,조심하지 않으면, 내가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에고' 에 빠지게 된다라고 설명하고있다.

 

스님들은 판단을 하게 되면, 에고에 빠지므로 판단 자체를 하지 말라..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됐는데.. 나름 구체적으로 설명 해주고있다.
Now 라는 책에서는 2쪽 정도의 분량으로 에고에 대해 설명을 한 반면.
이 책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준다.

 

스님 책은 덜 구체적이고,
서양의 영적 지도자(?) 의 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이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 운명상을 말하지는 않지만,
명상 서적들 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에고'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에고' 를 '상자'로 표현하고 있다.
몇년전에 봤을때도 참으로 놀라운 책이었지만,
지금 나이가 먹고 세상을 알고보니 더욱 더 놀라운 책이다.
 

상세한 내용을 잊고 있어서도 그렇고,
예전보다 지금 내가 이해력이 더 좋아져서도 그런 것 같다.
오늘 찾아보니 이 책 2편도 나와있는가보다.


1편은 지금 책 제목이 바껴서 제목이
- 리더십과 자기기만 -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 1 이고,


2편은
-평화에 이르는 길 -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2 이다.


지은이는 아빈저연구소 라고 돼 있는데,어떤 협회라고 소개 돼 있는데,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이 책의 내용과 같이,
자신을 어떤 나은 사람이라고 나타냄을 방지하기 위해 서란다.

 

 

-  코너 탄생에 즈음하여...

 

책읽어주는 남자 공간안에는 책속에 즐거움이 있는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어찌보면 개인의 잡설을 읽는거 보다는 책속의 오묘함을 느끼는게 좋겠다 싶어

이 공간을 마련했고 쭉 앞으로 책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고 같은 공감을 얻기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 곳을 찾아와 주시는 분들께 보다 좋은 공간임을 허락 받고 싶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비망록에 적어왔던 책에대한 느낌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험서와 교양서를 가르는 선이 있다면, 그 선을 절묘하게 밟고 있는 책이다.

학원계의 전설인 이만기가 추천한 것을 보면 수험서(혹은 지도서)로도 적절한 모양이다.

쉬이 잠이 오지 않아 침대 맡에서 읽다가 방치했던 것인데,

수험생이 아닌 내가 보기에는 각 시에 대한 저자의 단평들은 너절한 것이 많았다.

학창시절 읽었던 시들 중에 기억 속에 묻혀있던 것들을 끄집어내는 효용이 있었다.  


1.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송수권 ‘여승’ 중


‘우는 듯 웃는 듯’으로 표현된 인상이 궁금하다.

 이야기시가 콩트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2.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에서 내가 알던 ‘벼람박’이 바람벽의 음운도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충청도 사투리였다. 나는 얼마나 많은 충청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시인의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월북이후 집필한 ‘집게네 네 형제’라는 동화시도 인상적이다.

방랑과 고뇌의 청년은 사라지고,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호호할아버지가 남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다.


3.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잠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오규원. ‘남들이 시를 쓸 때’ 중


남 같은 시를 쓰는 것을 견딜 수 없어야 시인이다.

만만한 말이 아니다.


4.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은 대학 시절 분명히 읽었던 시집인데,

수록된 시들이 처음 본 것 마냥 낯설었다. 어린 시절 독서의 허망함을 다시 느낀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좋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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