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 여와가 무너진 하늘을 고친 이야기를 중심으로,

불의 신 축융과 물의 신 공공의 싸움에서 화석연료(火)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 물질문명과 어머니,

자연의 자정을 상징하는 환경주의(水)의 대립을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전부터 품어왔다.

 

그러던 차에 딱히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위앤커의『중국신화전설』을 붙잡게 되었다.

정작 확인하려는 내용은 극히 짧았으되, 이 참에 중국신화에 대한 총정리의 기회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서 천 페이지에 가까운 지루한 정독하였다.


1권은 상고시대부터 주나라의 탄생에 이르는 선사시대의 신화를 다루고 있으며,

2권은 주나라 이후부터 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한 시기까지 역사시대의 전설을 담고 있다.

1권의 이야기는 저자의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난삽하였는데,

이를테면 축융과 공공의 싸움에서 축융이 전욱으로 대치되는 점이나,

요임금의 사위라는 순임금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제준이 요임금 이전에 벌써 등장하는 점, 등이 그러하다.

 

구전 되는 대륙 각지의 신화를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신화들의 내용을

자신의 일정한 틀에 맞춰 재단해 버릴 수 없었던 연구자의 고심을 추측해본다.

 

2권의 내용은 그야말로 ‘전설 따라 삼천리’인데, 오자서, 공자, 시황제와 같이

실재 역사상의 인물에 관한 야사가 대부분이다. 대게는 황당무계한 것들로,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不言怪力神) 『語』’ 는 공자님까지 발차기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역사士로 묘사하고 있으니, 실로 아이러니라 하겠다.

각 시대의 영웅이나 큰 스승의 위대함을 민초들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희랍신화, 히브리신화, 인도신화와 비견 할 수 있을만한,

체계적이고 드라마틱한 우리만의 상고신화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거나 몹시 빈약하다.

그런 까닭에『한단고기』같은 위서(僞書)로 위안거리를 삼고 있는 현상도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중국의 신화 속에는 인접, 혹은 같은 문화권 내에 있었던 우리의 신화적

상상력도 분명 혼재되어 있을 것인데, 이를 그저 남의 것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다.

투표를 마치고 들어오니 사무실에나가 내일 있을 프로젝트땜에

일을 해야 하는데 춥고 귀찮고 괜하게 컨디션까지 떨어진다,

 

회사에 전화를 해보니 마무리 일을 하고있는 직원하나

나오지않아도 금방 마칠일이라 하니 잘됐다싶어 잠을 청했는데

자다 금방깨고 말았다,, 다시 잠이들려면 머릿골아픈 책을 선택하여

읽어내는게 가장 좋은 수면제이기도 하다,

 

존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라는 책이  대통령 선거날에 딱맞는 책일 듯..

위정자에게있어 가장 손쉬운 통치 도구는 공포이다. 개인에게 국가가

사회계약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재산과 안위에 대한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의 적이든, 내부의 적이든, 그것이 없다면 수고스럽더라도,
공포의 제왕을 손수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렇게 발명된 공포는 대중을 타락시키고,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타락한 대중에게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제국의 일부,
소제국으로서의 요새는 자기 방어를 포기한 상태로 야만인들을 기다린다.
분노에 찬 야만인이 그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지 혹은 자비를 베풀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더욱 잔인한 야만인인 제국의 병사들이 떠난 요새는 가난하고 불안하지만 평화롭기까지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시종, 빨갱이 야만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는
현실 제국의 병사들도 이제는 저희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금의 우리네 술문화는 어떠한가?

하도 세상이 하수선해서인지 아니면 어떡하던 살아내야하는것이 명제인지

마음 편히 술 한잔도 못마시는 사람들도 종종있다.

 

어떤이들은 술을 물처럼 마시고 모든것을 잊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의 기운을 빌어 세상의 맺힌 것들을 풀어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술을 한잔도 못마시는 범생이인 나는 참 그런 광경을 보면 마음이 아린다.

어쩌자구... 어쩌다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오늘 향연이라는 책은 이런 현대사회의  복잡함에 미친듯이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마시는 한잔의 술자리 이야기 아니다. 아가톤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던 철인, 의사,

시인의 한 무리가 전날의 과음을 이유로 술 마시기를 그치고,

 

사랑의 신 에로스에 대한 헌사를 하기 시작하는것으로부터 향연은 시작된다.

그것은 신으로서의 에로스에 대한 찬미이기도하고,
사랑에 대한 온전한 정의를 도출하기 위한 진지한 토론이기도 하다.

 

수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웅변으로 사랑의 신을 이분하여 정의하고,
의사인 에릭시마코스는 인체 안에서 일어나는 질병과 치유의 과정을 대립에서
조화로 변화시키는 사랑의 역할로 해석한다.


그리고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현학적인 이전 발표자의 논리적 태도와는 달리
남녀의 사랑에 관한 흥미로운 신화 (영화 해드윅에 소개된) 를 이야기한다.


아가톤의 이야기를 지나, 소크라테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양파처럼 여러 층의 구조로 된 이 이야기는 다시 한 꺼풀 안쪽으로 들어가
만티네이아의 신녀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소개한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와의 산파법적 문답을 통해, 에로스의 중간자적 성격을 구명하고,
가사적(可死的) 존재자들이 (예를 들어 인간이) 사랑을 통해 불멸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불멸성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도.
이야기가 일순하였을 때, 주신(酒神)의 축제에서 술이 잔뜩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양상으로 흐른다.

 

내게는 이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사색을 즐기고 젊은이들과 진지한 토론을
하는 모습의 소크라테스에 고착되어있는 나에게 용감한 그리스 중장보병으로서의
그의 모습과 알키비아데스의 끈질긴 구애행동을 은근히 거절하는 부분이 퍽이나 낯설었다.
특히 미소년과 사랑을 나누는 현자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라니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당시 아테네의 동성애적 분위기가 참으로 이채롭게 다가온다.

 

70년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뒷골목 막걸리 집에서 니체와 싸르트르에대해 공방을 하던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당시에는 술만 마시면 왜그리 토론에 열을 올렸는지?

개똥철학을 줍어 섬기며 알지도 못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당시에 내 머리 기억속 존재했던 철학자와 시인과 소설가들은 다 어디로 간것일까?
 

수많은 술판을 오가지만 인생과 사상, 예술에 대해 떠드는 자리는 좀처럼 많지 않다.
'가볍게, 가볍게, 더 가볍게'가 요즘 술판의 경향성이다.

심지어 서로 말 한마디 건낼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술판은 번영한다. 
알키비아데스가 디오니소스의 난장에서 아가톤의 향연 찾아 돌아오듯, 
술잔을 잠시 내려놓고 짐짓 무거워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취흥으로 띄우는 자리를 생각해본다.

 

 

- 책속에서-

 

플라톤의 『법률』에서 인형의 예를 들어 음주를 덕성 함양의 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같은 문맥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감정이라는 뻣뻣한 철사와 이성이라는
유연한 금줄에 의해 움직이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과 같다.


만약에 이 인형에 엄청난 양의 술이 부어질 경우,
그 속에 있는 줄들은 뒤엉키고 인형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술을 과도하게 마시면 감정의 줄은 지나치게 활동적이 되고
이성의 줄은 마비되어 자제력을 잃게 된다. 반면에 적당한 양의 술은 인간의 영혼에
자신감과 젊음의 신선함, 부드러움, 온순함을 불어넣어, 그 영혼을 이성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준다.


사실 적당한 음주는 우리의 영혼을 유연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순전히 이성적으로만
사유할 때에는 전혀 생각해내지 못하는 여러 다른 대상들도 사유할 수 있다록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술 한 잔 한 잔 마실 때마다 적도를 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는 연습은
감정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모든 다른 덕목의 함양에 기초가 된다. 
역자해설 p. 197

 

 

정말이지 주말이면 할일이 없다.
요즘 한창 올림픽 기간이라 텔레비를 주구장창 보고는 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악을 듣고 있자니
내가 무슨 음악가도 아니고 하루종일 음악을 연구하듯 들을 수도 없고
결국 텔레비보다. 자다 음악듣다 지쳐 보는게 책인 셈이다.
 

남들은 내가 대단한 독서가 인 줄 알지만 딱 한사람만은 내 비밀을 알고있다
지독히 책 안읽고 텔레비젼 드라마 매니아 인 것을...ㅎㅎ
그래도 지식욕에 눈이 멀어 한번씩 책을 잡으면 정신없이 몰두하는게 나이기도하다


98년도 이후 그래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읽고 있는 잡지가 있는데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안목이 높은 문단 어르신들이 가려놓은 단편들이니

어두운 내 눈을 밝혀주리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고, 백수의 다른 말이기도 한,

사이비 문학도 행세를 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비 소양이니 일종의 의무감으로,
다시 말해 억지로 읽어내는 것이 보통이다.

 

말이야 억지로라고 하지만 때때로 괄목상대한 작품 앞에서 즐겁기도 하였으나,

올해 문학상 작품집도 아닌 지나간 이 길지 않은 책이 더디 읽힌 적은 없었다.
대상 수상작인 전경린의 소설이 맨 앞에 실려 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대상 수상작과 자선 대표작을 읽으면서 내용 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도 잘만 갈고닦으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 이외에 별 다른 감흥은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술은 사기라는 것에 엄청 공감을 한다.


사실 5년전 책을 우연히 발견한 것도 이상하다.

에어컨 설치때문에 에어컨을 이동시키다가 발견 했으니 그동안 책을 몇번이나 정리했음에도
책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독서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반증이다.
오늘은 그 덕분에 반성을 하고 책을 집중해서 읽기는 했지만 대상 수상작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하품의 연속이였으니.. 에허~~


단편집들의 간략한 내 생각들을 단문으로 적어본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  전경린

: 할말이 없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1 - 전경린

: 잠꼬대 같다.

 

빗속에서 - 공선옥

: 불운하고 답답한 사내다. 

 

아버지와 아들 - 한창훈

: 서로 어깃장 놓는 부자의 수작이 유쾌하다.
  결말이 익숙하여 전원일기 같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 조금 거슬렀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 - 김연수

: 십년을 책 속에서 해답을 구하는 인간.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약콩이 끓는 동안 - 권여선

: " 내가 저분을 입으로 빨아서 그려 " 이런 것은 참 난감하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 천운영

: 소년의 발랄함도 할머니의 누드를 찍는 모습도 어색하다.

 

첫번째 기념일 -편혜영

: 병적인 인물이다.

 

침이 고인다 - 김애란

: 작가의 프로필에 80년생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장차 저 이름 아래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을 예상한다.

 

1. 김남주의 시편을 읽으며 눈앞에 확연한 적이 있던 시대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아와 비아의 구분은 시시때때로 바뀌고
    전선(戰線)은 지루한 장마처럼 오르내린다.
    시대의 탓인가. 내 앎이, 내 의지가 박약한 탓인가.

 

2. 후기시에서 시인의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을 읽었다.
 「자유」를 낭송하던 쩌렁쩌렁한 육성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3. 잔뜩 찌푸린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를 읽다가
   애상이 북받쳐 목울대에 힘을 줘야했다. 아버지란 애달픈 이름이다.


(전략)
 느그 아부지가 너를 을마나 생각했는 줄 아냐 /
 너는 평생 돈하고 먼 사람일 것이라면서 /
 저 아래 징갤 논배미는 니 몫으로 띠어놓으라 하고 /
 마지막 숨을 거두셨단다 /


산언덕바지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무덤은 /
일곱 마지기 우리 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놈아 니가 그러고 댕긴다고 세상이 뒤집힐 것 같으냐 /


첫 감옥에서 나와 무릎 꿇고 사랑방에 앉아 있을 때 /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꾸중이 떠올랐다 가엾은 양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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