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은,
욕망을 덜어내는 것 그리고 진실을 바로 보는 것, 대상을 넓고 깊게 살피는 것,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일상에서 우리는 언어로 표현하려는 모든 것을 다 표현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비유를 들기도 하고, 사례를 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것이 이해되는 차원에서는 함께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소통과 교분이 단절되고, 몰이해와 오해도 겪게 되는 것이
항용 있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 안에 갇혀 있어서,
자신의 세계가 가장 완전하고 편안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자기 세계 속에 있는 언어가 아니면 관심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설혹 듣더라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자기도취가 자신과 다르거나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려 들고,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만이
옳다고 고수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참으로 소통의 원활하지 않음에 대해 힘겨워한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남의 속내는 꿰뚫지 못하여 안달하기도 한다.
믿고 간과 쓸개를 보여주면, 어느새 냉큼 뒤집어 놓고는 의기양양하게
도끼자루를 들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주 웃기는 짬뽕이 되는 경우다.


앞에서는 웃음 짓지만 뒤에 감추어진 음험함을 측량할 길이 없기도 한다.
정글이라고나 할까?. 정글의 법칙-­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처절한 곳에서
우리는 싸우고 있다. 뒤돌아보고 곁을 보면 맹수들과 독충(毒蟲)과 독초(毒草)와
늪지가 감추어진 밀림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 도시는 밀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밀림안에 사람들은 저마다 '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고립되어 있는 '섬'들...
그'섬'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망(網)'­(이메일, 핸드폰 등) 은 광범위하게 덧놓여 있다.
수많은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는 '망'들 사이에서 스스로가 '섬'이 아니기를 어쩌면
스스로 '섬'이 아닌척하는  갈망하는 목소리들로 그 밀림을 가득 채운다.


그 목소리들이 밀림 곳곳에 숨어 있는 맹수와 독충과 독소와 늪지들에 대한 판단을 덮어버린다.
차를 타면 목적지까지 이르는 동안 그 목소리들을 들어야 하고.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에서부터
낯뜨거운 이야기, 욕설과 상말로 범벅이 된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등등,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들어야 한다.


상황을 되돌아보자..
사람들은 자신을 말할 때 자기 자신의 성격이나 학벌, 외모, 직장 등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또 자신이 그 누구와 관계맺고 있는지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알게모르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부풀리기위해 혹은 자신이 잘나간다는 것을 보이기위해(?) 사회의 저명인사 또는
소위 기름끼 자르르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에대해 복어 배 부풀리듯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이런 이면에는 자신의 사회적 불리함이나 조금은 열등감 때문에
"나는 누구와 친구야, 내 삼촌이 의사야.. 등등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몇가지 위장을 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일종의 자기과시일 듯도 싶고,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지 싶기도 한다.
짜증이 날 정도로 '남'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는­- 스스로가 고립된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키는
이런 의식 속에 나도 사실은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말'이 흐르지 않음으로써 '말'이 흐르는 그 기묘한 역설을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머리에 햄머를 맞은듯 충격적으로 가슴 뭉클하게 소통의 장을 만들어낸 영화로 기억을 한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묵묵히 감내하고 포용하면서 결국 손자와 소통하게 되는 할머니,
마침내 할머니의 가슴속에 담겨지는 손자의 이야기, <집으로…>는 한 편의 동화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동화는 포근하고 아름답다. <집으로..>라는 동화는 군더더기 없고 맑아서 가슴속에
파장을 일으켜 눈물짓게 한다. 우리 시대는 동화가 사라진 시대가 아닌가싶다.
할머니 또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동화를 듣던 시대에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소통이
원활했다고 생각을한다. 그 때에는 '정'으로 묶인 '말'이 존재했지만, 이제 우리들은
그것을 잃고 고통스러워 하는것은 아닌지 생각해볼일이다.


할머니처럼 허물어서, 낮추어서, 감싸안으면서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나를 허무는 방법을 모르고. 낮추는 방법도 모른다.
감싸안는 방법도 모른다. 아니, 다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것이다.


아집일까. 독선일까?  할머니의 느릿느릿한 걸음은 손자의 도발적인 발길과
질풍 같은 걸음을 감싸 안는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는 회전속도를  측량할 길 없지만,
그 소용돌이의 바깥에서는 맴돌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느슨함이 있다.
어둠이 내려안는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오고 이제 나도 '집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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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따뜻한 늦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내가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는 풀밭이 아주 많았고
나비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을 해.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오랜만에 잡아보는 배드민턴 라켓...
이리저리 휘두르다 나비를 보았어..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아빠 노릇하기도 참 어렵다..두털대듯 넋두리를 한 것도 같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나비가 많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어.
노랑 나비도 아니고 흰나비를 처음 보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떠올렸고..


나비야.
내가 처음 본 나비.
예뻐. 아주 예뻤어.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 그냥 예뻤던 나비.
다가가고픈 생각에 난 무심코, 정말 무심코 였어.


무심코 휘두른 베드민턴 라켓. 난 그냥 다가가려 했거든.
난 그냥 내 손길을 알아주길 바랬거든
근데 그 해의 첫 흰나비는, 우수수.... 가루가 되어 떨어져 버렸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어. 찢겨져 가루가 되어버린 흰나비.


짧은 시간에 겪은 아주 단순한 사고 같은 것인데 내머리 속은
엉망으로 뒤 엉키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져 있어.
아마도 마음 깊은곳에 흰나비의 처참했던 죽음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연상되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마음의 찜찜함을 치유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기억속 상흔은 꽤 오랫동안 자리를 잡는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치유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말인지 모르겠다.
상처는 치유될지 모르지만 깊은 곳에 패인 상흔은 삶과 더불어 남으니깐..


이 봄...
다시 꽃이피고 나비가 날고 벌이 날아들겠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내 곁에 꽃이 있을 것이고
나비가 날아와 내 눈을 다시 황홀하게 만들겠지.


시간이란 정말 놀라운 치유능력을 가졌지만
내 마음 깊은 곳 나비에대한 기억은 한 순간 실수로
버려지고 찢겨진 어둑한 흔적으로 남겨질까 걱정이 되네,


어디선가 귓가에 들리는 어릴적 부르던 나비 노래

 
나비야~ 나비야~ 이리날라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이젠 아이와 놀아줄 그때 그시절도 없을 것이고
우연히라도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을때 나비가 내곁에 올일도 없겠지.
하지만 어느틈에 치유하며 살아온 상흔에 다시금 반복되는 그림은
그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해..


오늘은 토요일 주말..
따스한 스토브 아래 봄날의 여유를 만끽하며 사무실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원을 듣고 있어.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높기도 낮기도 한 음율..
난 그때 그 나비와 함께 청명한 하늘을 날으며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나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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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빛깔과 매력을 갖고 있지요.
동시에 자신에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상대방의 파장에 반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인관계의 폭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미운 사람 등등. 특정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특정한 사람과 결혼을 하며, 부딪치는 사람과 싸우고 결별을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감응점일 것 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은 누군가?  싫어하는 타입은 누군가?
특정한 감응점을 갖지 못한 채 무수히 많은 타인들에게 전부 감응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떤 타인을 접하든지 상대방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스펙트럼 중 하나에 홀리는 타입이면
호감은 쉽게 갖지만 안정된 관계를 영위하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타입을 소위 바람둥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는 타인에게 반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몰입한다는 뉘앙스가 들어 갑니다. 그런 것조차 없는 사람에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놀라울 만큼 찬란한 빛을 내면서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 보입니다.
감정을 멈추어서 영원으로 만들 수 없기에,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상대방이 보조를
맞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공기처럼 자신을 감싸 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뿐 입니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마음을 끄는 편린들을 발견하고는 감정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마음이 별똥별처럼 환한 빛을 내며 흘러 갑니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찰나...
박살나 있는 금성이 불러일으키는 변덕. 상대방의 파장을 온전히 흡수해 취해 버립니다.


흐름이라기보다는 번갯불처럼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어서 '사로잡히는 것'이지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다. 호감이라고 부르기에는 강도가 지나치게 세지만,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속성이 너무 짧습니다.

 
타인, 그 자체에서 느끼는 에피파니. 이것이 나란 사람의 패턴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삽질은 또 얼마나 했었는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탓에 성 정체성도 종종 헷갈려 가면서
의미화를 시켜보려던 순간들. 지나치게 강렬한 자극과 파동이라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면 이 감정은 퍽 소중 합니다.


나는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시선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체험 합니다.
그 느낌을 되살리거나 다시 경험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 단발적인 사로잡힘을 관계로 연결시켜서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상대방이 내 인생에서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을 잠깐 증폭시켜서 느끼는 것이니깐.

무엇보다도 이것은 일방적 입니다.
타인의 파장에 휩쓸리는 것이지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들은 얼마 안가서 흩어 집니다.
 

안정된 관계는 오히려 무언가를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사람하고만 가능 합니다.
배려 깊은 동반자이자 재능 있는 협력자, 훌륭한 파트너로서의 연인은 그래서 내게
무척 중요 합니다. 나는 그 이유로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 입니다.

 

여전히 타인의 존재가, 영혼이, 순간적인 반짝임이 전신을 짓눌러서 숨을 쉴 수가 없는

경험을 하곤 하지만 이젠 명확하게 압니다. 사람의 특정 한 순간을 포착해서 반응하는,

의식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기질 혹은 본능으로 갖고 태어난 미묘한 감응점이

내겐 상당히 명확하고, 강렬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내가 태어난 순간 밤하늘의 중요한 별들은 모조리 처녀좌에 있었던 까닭일까?
타인의 한 부분이 내 별무리와 좌상을 이루면서 지나갈 때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 전체와
관련 되어 깊고,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일까. 의지와 상관없이 아득하게 몰려왔다가
사라지는 파장들. 덕분에 사람에게 영매를 당하는 느낌 입니다.
 

타인은 그렇게 쉽게 나를 뒤흔들고 지나 갑니다.
강렬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관계에 대한 욕구는 아닙니다.
덕분에 인연을 관조하는 법을 배웁니다. 운명이라면 그 모든 관념과 터부를 넘어서 그사람은
내게로 올 것이기 때문 입니다.


지속적인 호감으로 중첩된다면 모든 상황이 나를 그의 곁에 있게 만들 것입니다.
마음의 자기 폭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 합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면 더욱 더 그렇겠지요?

 

 

사랑은 창밖의 빗물같아요.
양수경의 노래로 유명 하지요?
왜 사랑이 창밖의 빗물같은가?


잊을만하면 느닷없이 쏟아져오기 때문이고, 그러다 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듯
잊혀지기 마련인것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창밖에 빗물같습니다.
작사가가 누군진 모르지만, 정말 멋진 비유 입니다.
오늘은 약간의 봄비가오고 왠지 마음에 인연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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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으세요? 팁하나을 알려드립니다.
아기들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멍하게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간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교육 심리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 시간 동안 아기들은 어른들이 구축한 것과는 다른 자신들의 세상을
쑥쑥 만들고 지어나가고 있다고 하네요, 신기하죠?

 
그런데 대개의 엄마들은 아기들이 가만히 있는 시간을 걱정 합니다.
부모가 가르쳐줘야 할 것중 절대적인 것이 있다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고 교육학자들은 누누이 강조를 합니다.


인류에게는 원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름다운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능력을 현대인들은 가장 많이 잃어버린 능력이라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쏘아보아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보지 않아도 좋은 영상은 넘쳐납니다. 보아야 할 것들에 지쳐서 눈을
감아버리고 마는 안쓰러운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느껴질 때가 참 많지요.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는 평화롭고도 조금 쓸쓸한 즐거움을
우리는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깨의 힘을 다 빼고, 나를 삶의 코너로 몰고 가는 근심 걱정도 다 내려놓고,
창밖의 세상을, 벽의 무늬를, 책장에 꽂힌 책들을, 나무를,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목적에 사로잡혀 힘이잔뜩 들어간 마음의 근육들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힐링'의 효과를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늘이 바람을 자유롭게 풀어서 보내주듯이
우리도 마음에 가둬놓은 것들을 풀어서 세상 속으로 내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마음을 풀어주고, 홀가분한 상태를 경험해야 합니다.
단 5분이라도 말이죠. 그런 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요즘처럼 따쓰한 오후 차한잔과 함께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아무런 생각없이 쳐다보세요.
눈과 귀와 콧속으로 봄의 기운이 마구 흘러들어와 행복함을 만끽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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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 마리아노라는 모델을 아십니까?
제라 마리아노가 오래 전 서울에 왔다는 사실을 오늘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가 무얼 하는 여자인지 잘 알지 못했으나 광고계에서는 심심치않게 이름이 
거론이 되어 들은적이 있어 기억은 하고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서 다음주 28일 있을 광고주 Pitch 건 때문에 자료를 찾기위해 지나간

광고를 뒤적거리다가 모아 놓은 스포츠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한국계 속옷 패션모델 제라 마리아노(Jarah Evelyn Makalapua Mariano)가
방한해 국내 활동 중인 제시카 고메즈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라고 쓴 기사와 함께
내 눈을 호강을 시켜주는 농염한 포즈로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려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는 모델인가를 한눈에 알수있는 멋진 사진들로 가득차 있었다.
역시 시각자료는 학습효과가 높다더니. 난 이제 그녀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
아마 그 당시 그녀는 리바이스 바디웨어 광고를 찍기 위해 입국했던 것 같다.


그녀는 유명 브랜드 빅토리아 싯크릿이라는 여자 속옷 모델로 아주 유명했던 모양이다.
사진을 보며 눈을 즐겁게 하고 있는데 헉~ 이런 여자와 어울리려면 이 정도 몸은 되어야지
라고 말하는 듯한 남성이 등장한다. 현실이 말해주는 냉엄한 진실,  
S라인은 식스팩과 놀고 엄친 딸은 엄친아 와 놀더란 말을 증명 하는 듯하다. 


나도 지인들의 권유에 따라 여자에게 속옷 선물을 두어 번 한적이 있다.
다행 이도 오래 전 여성 속옷 광고를 담당한 적이 있어 사이즈를 측정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은 없으나 속옷은 굉장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선물하기 쉽지 않다.
은밀한 메시지로 오해(혹은 이해)받기 쉬우므로 혼자만 친밀하다 느끼는 사이에선
곤란한 것이다. 사이즈 선택 역시 간단할 리 없다.


딱 맞는 사이즈가 가장 좋겠지만 상상만으론 예측하기 무척 힘든 분야에 속한다.
그런데 브래지어의 경우 조금 큰 사이즈를 선물 받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내 생각이다.


속옷 선물하기의 매력은 언젠가 내 손으로 직접 오픈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까만 마음
(aka 흑심)이 핵심이라 생각이 드는데, 브리프 류 중에선 일본에서 유행했던

나이키 드라이핏 팬티가  그 중 하나 마음에 쏙 드는 속옷이고 그리고 트라이엄프 레드칼라 이다.
여자들에게 선물을 할 때는 가능한 빨간 속옷을 선물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중국 주술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여자에게 빨간 속옷을 선물하면 돈도 잘벌고 집안이
화목해진다 하니 모름지기 속옷은 여성분들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잠깐 빗나간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한때 일본에서는 ‘노판 샤브샤브’라고 하는 가게들이 성업했었다고 한다.
‘노판’은 노 팬티의 준말이다. 즉, 노 팬티 샤브샤브라는 것인데.
곱게 곱게 한국에서만 살며 꽁꽁 껴입은 여자들의 속옷만 궁금해 하며 살던 나로서는
이런 류의 가게가 성업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본을 동경하게 된다. ㅋㅋ


노판 샤브샤브는 말 그대로 일반 샤브샤브 요리를 먹는 음식점에서 노 팬티의 여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회사 카드로 식사하러 가서는 노 팬티 여성들과 시시덕거릴 수도
있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굉장한 인기였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무교동과 다동 쪽 레스토랑에서는 일본의 노판 가게의 이미테이션이라 할 수 있는

옆이 쭉 찢어진 롱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점심식사 시간 서빙을 하던 적이 있었다.

광고주에 방문하면 담당자들이 응근히 나를 핑계로 그곳엘 데리고 갔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팬티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궁금증과 함께 한낮에 샐러리맨들의 귀여움과 환영을
독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럴진대 노 팬티라면 남자들의 시각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었으니
엄청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크게 유행했었다고 하는데(당연하겠지) 지금도 살아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에서는 그런가게가 유행을 하는가 싶더니  금방 사그러들어 흔적조차 없다.

그만큼 남자들고 유행하면 열광하고 또 이내 시들어 지면 쳐다보지 않는게 잡은 물고기

밑밥 던지지 않는다는 말과 일맥상통 한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ㅎㅎ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는 일본엔 지금도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런데 분명 노 팬티라는 것은 치마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치마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마 팬티만 입지 않은 채 긴 청바지 따위를 입은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그렇다면 제 아무리 짧은 치마라고 해도 여간 해서는 속옷의 유무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즉, 이 음식점의 서빙녀(물론 여자겠지?)들의 노팬티 여부도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굉장한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 이상 그리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노팬티 콘셉트는 단순히 상상만으로 흥분을 일으킨다는 것일까?


아니면 손님 앞에서 샤론스톤의 다리 바꿔 꼬기 쇼라도 한다는 것?
어찌되었든지 간에, 속옷을 입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면서 혹은 지켜보면서
샤브샤브 요리를 먹는 것은 어쩐지 ‘by the way’나 ‘anyway’같은 느낌이 든다.


앗, 김 과장님. 지금 서빙녀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팬티를 입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뭐엇! 어디?  앗!  저건 마치..... 오, 굉장하군. ……
아, 그나저나 이대리 자네, 이번 보고서는 상당히 훌륭했어. 라든지,


이봐, 너 요즘 OO씨랑 어찌 되고 있어?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 거야?
뭐 나야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아직 한참 때니까……
근데 그건 그렇고, 우리 옆 테이블 서버가 지금 허리를 굽혀 바닥의 쓰레기를 줍고 있어!
뭣? 어디!? 히야…… 와 같은 상황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이 '노 팬티'라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 자신이 노 팬티 상태라는 것을 알리며 나를 유혹했다든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여성의 하의를 탈의시켜보았더니 노 팬티 상태였다! 하는 경험이 부끄럽게도 전혀 없다.

 
비슷한 경험마저도. 전무. 정작 중요한 콘돔은 없어도 팬티만큼은, 이쪽도 물론,
항상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나는 팬티를 항상 착용하는 정숙하고 위생적이며
꼼꼼한 여성들만 상대해온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정숙하고 위생적이며 꼼꼼한 대인관계를
유지해온 나로서는 노 팬티의 매력을 상상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대체 노 팬티라는 것은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저 좋다! 는 느낌보다는 깜짝 놀라거나 오히려 보는 쪽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것 같은데. 포르노는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해도 정작 가슴 선이 드러나는

티셔츠나  아찔하게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와 마주 앉게 되면 어쩐지 불편한 마음에 자리를
피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어쩌다가 이 얘기로 삼천포 했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에게 힘이 되고 야생적 의미를
심어주는 것은 여자의 속옷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써본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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