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 책 냄새는 한층 눅진하고 꿉꿉하다.
오래 곰삭은 것들과 이제 삭기 시작한 것들이 어우러져 날 선 신경을 어루만지고
가라앉히는 냄새.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 위로 펜 지나가는 소리,
나지막한 인기척, 멀리 들려오는 경적 같은 온갖 소리가 빗소리에 자리를 내준다.


빗소리의 블랙홀에 빨려들어 분간하기 어렵다.
고개 돌려 창 밖을 보면 바깥세상을 점령한 하늘 물줄기가 유리창 너머
이쪽을 끊임없이 넘보고 있다. 부딪치고 치근대고, 끝내 적시지 못하고 꼬리를 끌며 거꾸러진다.
그래도 은밀히 품은 비린내는 기어이 사람들이 아는 통로와 모르는 통로로 흘러 들어와
책 냄새를 진하게 만든다.


가방 속에서 미지근해진 캔 커피가 유난히 감겨 들고, 기억 보관함 속에서
미약하나마 생기를 간직한 장면들을 책상 위로 술술 불러낼 만큼 진하다.
단지 기분 탓이라고 한구석 제습기가 심드렁히 말하는데도,
방심한 틈에 어느 페이지 어느 구절이 후두두 떨어져 내리며 파문을 남긴다.
파문 너머로 삼엽충과 암모나이트가 잠깐 비치다 사라진다.


고즈넉한 행간의 기묘함을 몇 번이고 엿보고 싶다.
언제까지나 빗소리와 함께 글자를, 종이와 마음을 오가는 글자를 영원히 꼭꼭 씹어먹을까?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지인으로부터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라는 책을 선물 받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갑자기 건강문제와 주위의 산만한 일상들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행 이도 내가 가입되어있는 독서클럽 발제가 위험사회였으므로 한참 걸릴 시간의 독서량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첫 장을 읽을 때부터 거의 마지막 장까지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는 조금은 협박적이고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현대사회의 위험을 알린 책이라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의 위험은 항상 두려움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심리를
통제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울리히벡은 심각성을 주장하고 있다.


왜 현대는 이런 위험요소를 가지는 것일까?
현대의 일상성을 보면 인간생활의 편리성을 위해 아웃풋을 만들어내는데 그 잉여가치를
위해 가장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그 무엇을 동원해도 인간의 문명을 위해 자연의 재해나 생명의 존귀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런 문명의 발달이 인성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의 정의로움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근대화라 칭하고 이러한 근대화의 성공은 새로운 위험을 수반한다,
울리히벡은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접근한다
울리히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려 이렇게 표현한다,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근거 있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생기는 모든 폐해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요인으로 즉각적인 위험요소를
개발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불안해 하지만 결국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과학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고 인간의 삶은 더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울리히벡은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고 인간중심의 세계를 찾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즉 인간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진보만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과학기술, 어찌 보면 편리함과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 생성과 소멸 가운데 인간의 의지로
관여될 수 없다면 결코 행복 해질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올바른 주장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 책은 볼수록 어렵지만 울리히벡 책 역시 만만치 않은 책이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근대를 살아가는 아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일독을 함으로
자신의 주체성에대한 그리고 문명에 대한 접근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는 개념의 책이라 생각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20세기에 책이 발간되어 21세기를 거쳐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조금은 오울드니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타의 문제를 제외한다 해도 핵에너지 기술 발전에 복속된 문제를 본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울리히벡의 위험사회를 5가지로 압축해본다면....


1. 현대의 위험은 방사성과같이 인간의 평상적 자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2. 위험의 사회적 지위가 나타난다.
3. 위험의 확산과 산업화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린다,
4. 부는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5.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5가지로 압축을 하고 나니 아주 오래 전 살찐 장미의 위안이란 제목으로 블러그에 글을
써놓은 것이 생각났다. 아마 위험사회의 내용 압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느꼈던 느낌대로 느낄지 모르겠다.
책이라는 게 읽는 이들의 감성에 따라 달라지니 말이다 .

 

 

그때 써놓은 글을 잠깐 발췌하면..


자정 넘겨 집으로 가는 길...
강으로부터 조금씩 배어 나오던 안개가 어느 틈에 길을 침범하기 시작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차들 때문에 막연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짐짓 모른 척 묵묵히 달리고 있는 차들 틈에서 바람에 실린 물결처럼
떠내려 가고 있는데, 흐느끼는 듯한 아리아의 가락이 라디오에서 마악 시작될 무렵,
영동대교 조금 못 미쳐 갑자기 엉켜져 있는 불빛들이 속력을 막아 선다.


사고가 났다.
세 대의 차 중 두 대는, 고무찰흙을 벽에 세차게 던졌을 때처럼
앞쪽이 뭉개져 있고, 사륜구동 차 한대는, 반듯하게 뒤집어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렉카차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고 뭉겨진 차 옆 흔적에
핏자국이 흥건하고 이미 환자를 실은 앰블런스는 떠나갔는지 무질서하지만
평온함의 평정을 찾고 있었다.


몇몇의 남자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이고,
내가 그들 바로 옆을 비켜갈 즈음,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오고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한다.


또 다른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교통사고로 인해 재판장까지 서야 했던 그 기억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엇갈린 희비.


가해자는 자기에게 닥쳐진 불행이라 말을 할 것이고.
피해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날벼락을 맞아 병원신세를
져야 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어야 하는 시련을 맞게 된다.


문명의 편안함이 가져다 주는 두 얼굴의 변화.
엑셀을 세게 밟으며 죽음으로부터, 아니 죽음에 근접한 사고의 공포로부터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올리히벡의 위험사회를 읽으며 포퍼(R.Popper) 반증주의를 처음 제시한
" 과학적 발견의 논리" 라는 책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 걸려 읽지 않은 책이라 수박 겉 핧기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울리히벡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증오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혼자 지내는 시간들이 줄어들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나의 하루는, 조금은 촌스러운 음악을 들으며,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친구나
자주 만나는 지인들과 함께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거나 밥을 질펀하게 먹거나,
가끔은 어디서 주워들은 어려운 이론들을 가지고 농담따먹기도 하며,
영화 혹은 음악을 즐거운 문화가 아닌 따분한 학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 또한 심심해지면 사람들을 조소하거나. 뒷담화하는 것이 일상인데
이런 것이 재미라 생각이 드는건 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꼭 누군가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곧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 질 것이라고,
그들이 너에게 등을 돌리고, 혹은 내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나와 함께 해주는 고마운 친구들, 지인들, 더불어 살아주셔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오늘 왠지 장맛비가 거치고 나니 변화무쌍한 현실에 맞서 수천 수만의 호흡과 결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주접스런 글을 쓰게되네요.
그래서인지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위지인들과 소통을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덧칠한 형식주의적인 유산들이나 탁상의 사변에서벗어나
실존적 가치를 가진다면 역설이 아닌 행복함이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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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맛비가 퇴근시간에 때맞춰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 시간, 고스란히 비에 젖은 처량함과 고독감이
차츰차츰 어느 틈엔지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눈물겹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울대를 넘지 못하고 다시 속으로 흘러내려서는 온몸을 적시고는
숨조차 고르지 못하도록 가슴을 메우고, 목을 메우고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혼자 사는 삶이라서 그러지 싶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부정을 해봅니다.


고독하다는 것에는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몸...?
누가 굳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일다가도 자락이 잡히기도 전에
가라앉는 삶이니, 해가 바뀌고 나이 하나 더 든다고 달라질 까닭이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내리는 비를 보고 슬퍼진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를일 입니다.
하긴 내리는 빗줄기야 가을비가 봄비보다 더 처량할 터이요,
어제처럼 한여름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와 함께 온 땅을 적시는 장대비에서도
울음을 토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내리는 비란 온갖 때(垢)로 가득한 자연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나면 앞산도 더욱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고, 삼라만상 모든 것의 자태가 맑고
고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침녘에 긴 밤 기나긴 꿈으로 젖은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와,
한밤에 하루 일과로 지친 고단한 온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더없이 경건하고 신성한 노동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겹겹이 앉은 겉의 때를 씻어내는 그 조그만 시간은 그래서 더없이 진중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물을 쓰는 일이 겉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라고 한다면, 속의 때를 씻어내는 의례는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에티카(Poetica)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것도 어깨를 들썩이거나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눈물은 겉으로 쏟아져 나오질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흘러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런 기억을 갖고 계십니까?
오래된 영화에서나 흘러나오는듯한, 잡음 많이 낀 오래된 레코드 판처럼...
머릿속에서 힘겹게 돌아가며 아련한 음악을 쏟아내는 음성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빌리홀리데이의 음성입니다.


장대비가 그렇게 내리면 수많은 스크래치는 갸냘픈 신경사이를 배회하며
꿈결인듯 오래된 시간 사이를 헤매며 나의 속때를 벗겨내는 듯 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저 먼 시간 속으로,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그 아득한 경험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갑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오릅니다. 추억을 한다는 것은 더 괴로운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조그마한 공간밖에 둘러볼 줄 모르는 나는,
오직 내 몸뚱이 하나밖에 가리지 못하는, 참으로 이기적인 우산을 받쳐들고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빗속에서 갈 곳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까닭없이 우울했고 이유없이 슬펐으며 근거없이 외로웠고 건방지게도,
삶이 싫어지고 있었습니다. 위태롭게 지속된 사랑은 이제 곧 나를 떠나려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막바지에 다다른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가슴 저리고 있었습니다.
삶이란 것이 빗물처럼, 형체없는 물처럼, 투명한 그 물빛처럼 그러하기를 원하고
있었는지 모를일입니다.


그날도 어제와같이 빗속에서 우산이 젖고 바지단이 젖고 마음이 젖어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서점에를 들어갔습니다.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통로, 날 갑갑하게 옥죄고 있는 사랑으로부터 날 구해줄
무언가를 나는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김갑수씨의 책입니다.


서점에는 그 책이 다소곳이 놓여있었습니다.
글쎄...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삶이 과연 남들보다 더 괴로운 것이고
남들보다 더 할 이야기가 많으며 남들보다 더 아파해야 할 것인지를?...
하지만 그 비 많던 7월의 어느 날 그 책은, 아니 그 책의 제목은 제 가슴으로 파고들어
내 삶이 그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게 괴로운 것이라는 최면을 걸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집어들었고 그리고......
음악을, 아니 재즈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나는 내내 빌리 홀리데이의 테잎을 듣고 있었습니다.

 

        

낡은 워크맨에 끼워넣어 회사를 오가는 길가 에서나 잠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깊은 밤이거나 빌리의 음성이 내 귓가를 채우도록 만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성은 빌리의 그것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었고 나에게는 먼나라의 이방의 언어처럼 낯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리가 근 한달이나 내 귓가에서 노래를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새된 목소리, 터무니 없이 작고 터무니 없이 힘 빠진 듯한 목소리에
나는 적응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김갑수의 그 책을 만났고 사랑이 날 흔들리게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재즈로 향한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다시 재즈에 옥죄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의 사랑만큼은 날 힘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재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시간...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오래된 시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의 생애는 57년까지였으니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악은 당연히 오래된 음반입니다.
더구나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 였으므로 우리가 듣는 그녀의 음성에는
지금의 완벽한 음향 사운드 시대에서 볼 때 형편없는 빈약함과 터무니없는 허약함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에는 지금의 기계 빛 음악이 줄 수 없는 어떤 아련한 추억과 쓸쓸함과
허무 혹은 낭만이 전해져 옵니다. 디지털 시대의 복원 기술로도 다 해결할 수 없는
스크래치와 잡음과 음향의 빈약함은 채워질 수 없음으로 인해 더더욱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갖고 계십니까.
머리 속에서는 오래된, 잡음 많은 레코드 판이 돌아가고 어딘지도 모를 과거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복귀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빌리의 음성을 들으며
그 오래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본 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빌리와 함께 잡음 많고 비가 내리는 그 오래된 과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어떨지 한번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방과 서울은 기후에 큰 편차가 있네요
서울은 후덥지근하고 왠지모를 짜증이 넘쳐나는 날씨입니다. 아마도 충청이남
지방은 폭우로인해 비피해가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빌리의 음반을 하나 소개합니다.
Billie Holiday-Strange Fruit : 1935-1944 New York ~ Los Angeles
재즈 음반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를 드나들어 보신 분은 아마도 이 음반을 아실 겁니다.
두 장짜리 음반에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지요.


아마 12000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굿(good)'이라는 음반사에서 나왔습니다.
가격이나 기획에 비해 음반의 내용은 참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전성기는 3, 40년대인데 이 음반에는 그 시대의 대표곡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사실 나는 빌리 홀리데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재즈로 이끈 시발점으로서
혹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애도로서
이 음반을 구입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재즈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낡은 음악이 내게로 가져다 주는 오래된 시간까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 앨범에서의 몇곡을 올려놓습니다.

 

 

 

 

 


 

 

 

부끄럽게도 내 부실한 몸뚱아리에대한 얘기를 한번더 해야할 것 같다,
지난, 아주 정확히 얘기하자면 심장내과 CT촬영의 결과를 듣고 온 그날,
태연한 척은 했지만, 마음속 긴장감은 대단히 팽배해 있었나보다.
그날부터 앓기 시작한 감기 몸살이 오늘까지 연속적으로 몸을 괴롭힌다


중간에 건강을 걱정해주신 분도 있고해서 이럭저럭 잘 버팅기고 있었는데
그렇게 몸이 아프다보니 나를 집요하게 짓누르던 것 하나가 있는데 외로움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가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러면서도 그 외로움이라는 것이 묘하게도 싫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렇다고 그닥 반길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닌 것이 참으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보통 영화나 책을 보면 대개 나처럼 혼자서 떠났다가 반드시 누군가를 만난다.
윤대녕의 『달의 지평선』의 주인공처럼,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의 주인공처럼
자꾸만 묘령의 여인네를 만나는 것이다. 한번 만나는 것으로 모자라 자꾸만 마주쳐서
기어코는 둘을 붙여놓는 것이다. 작가란 그런 작자들이다.
자기가 겪은 그대로를 써서는 작가가 되기가 어려운 것이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토이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의 연주곡 중에서 '길에서 만나다'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면 정말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없다. 어딘가에 차를 세워두고 커피를 마시며 
한참동안 멍때리고 있다가 듣고있던 카세트의 B면을 들으며 되돌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영화나 책이나 음악에서는 모두가 누군가를 만나지만,
현실 속의 나는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던 모습 그대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내 삶은 아직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좀더 외로워도 되는 것이 아닐까 위로를 해본다
생각해보니 거참 그럴싸하다. 조금은 마음에 들지않지만 외로움은 자극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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