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2103293F51E3BC2304)
습기 찬 차창으로 보이는 세상은 눈물인 양 내 마음 안에도 흐르는 것 같습니다.
지겹게도 내리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참으로 삭막합니다.
매일 지나다니는 강변 길, 홍수로 밀려간 그 자리에 뿌연 황토 빛 구정물하며 부유물들이
마치 내 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계절의 바람이 스쳐가 듯 6월의 시간이 지나고
7월의 하늘은 우리에게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을 허락 하는 듯 합니다.
7월의 우미갈정모…
마침 나가려 하는데 쏟아지는 빗줄기가 한참을 망설이게 하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작은 약속도 분명 약속일진데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플라토 미술관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약속이란 원래 즐겁고 행복한 일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자신들의 불문율이 아닐까 싶습니다.
플라토 미술관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시는 언젠가 본 엔디워홀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나도 오덕후(otaku)의 끼가 있어 그랬는지 아니면 아주 오래 전에 봐왔던 아주 익숙한
코코 피규어와(?) 사진을 보아서인지 보는 내내 아주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봤다면 슈퍼플랫
원더월드 고급스런 전시회 에게 민망스런 관람이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5963951E3B67412)
그가 만든 문양 안에 빠지면 마치 ADHD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나마 해바라기 문양과 캐릭터를 보고 있노라면 어린 동심이 올라와 기분이 좋아지지만요
정말 말 그대로 키치적이고, 오타쿠적이다 라는 말을 대변해주는 작품도 있지만 밝고 환한
모습의 강요되지 않는 웃음도 내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각적인 환상이 현대미술로의 승화된 모습이었다고 하면 50분 동안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관람료 5000원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36783751E3B7D722)
두번째 미술관으로 고고씽…
약간의 빗줄기가 이동상에 불편함을 주었지만 일민 미술관까지의 나눔은 또 하나의
색다름이었습니다. 탁월한 협업 자들 이란 타이틀의 미술 전시(?) 행위전시(?)
미술에 무뢰한인 나로서는 조금은 당황스럽게 만든 현대미술의 진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들의 미술관이나 철학적 가치를 분명히 전시에 담으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고나 할까?
제대로 그들의 철학을 미술관을 인식할 수 없었음에 미안함이 앞섰지만 그들에게 미술이란
하나의 삶의 절벽은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벽이란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한계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절체절명의
실존의 극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누구의 작품인지 인지하지 못해서 다만 미안할 뿐이지만 아마도 내가 관람하는 날
오디오만 나오는 독립된 공간, 앉아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잠시의 휴식공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그 소리에 몰두 했었습니다. 마치 그 소리는 제사를 위한 진혼곡 같은
소리로 들렸습니다. 낮은 신음소리는 마지막 생명을 장식하는 장렬한 음악 같았는데..
사실 그 소리가 정확한 소리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천사들의 흐느끼는 소리에
더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천사는 울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처참한 사슬을 비통해하며 그 사슬을 찢고 신 가까이로 다가갈 때 육신의
고통이 너무 처절하여 흐느끼는 천사의 울음소리는 아니었을까? 무한히 부드럽고 깊은 데서
솟구치는 고통과 희열의 소리는 아니었을까 하는 복잡한 심경의 소리는 내가 느끼는 인간의 마지막
음악소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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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예술 작품이 따로 없네요
7월 정모의 미술전시 관람은 극과 극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좀 색다른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
여인의 맨몸을 찍은 똑같은 사진인데, 하나는 흑백으로 하나는 컬러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컬러 사진을 볼 때 살의 건강한 빛깔과 매끈한 질감이 느껴져서 정욕(情慾)이 일렁였던 기억이 납니다.
살의 빛깔이 초록과 어울리면, 살의 질감은 손가락 지문 사이마다 살아나서,
감각은 어느덧 촉각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똑같은 맨몸을 흑백으로 접할 즈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욕은 흔적도 없습니다.
빛과 어둠에 의해 조율된 하나의 대상이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몸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풍경의 아름다움처럼 다가올 뿐입니다.
더러 빛에 의해 부각된 젖가슴이나 둔부, 샅 등을 볼 적에도 몸이 지닌 아름다움,
또는 몸에 기록된 삶의 흔적, 몸이 표방하는 삶의 양태 등이 읽혀지는 것이니,
흑백은 단조롭되 보이지 않는 나름대로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삶의 양상을 기록으로 그려내는 일을 흑백이 맡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성향이 강한 흑백의 필름에는 감정이 틈입(闖入)할 사이가 없지요.
객관적으로 삶의 실체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삶이란 것도 편안한 것은 아니질 않나 싶네요.
삶이 힘들었다는 둥, 그래도 좋았다는 둥 하고 생각이나 감정을 집어넣는 것은 때가
다 지난 뒤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컬러 필름보다 흑백의 필름에서 얻는 반응이 느린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미갈의 모임은 주제넘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옆집 할머니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혼자 사시는데 그분은 세탁을 할 때에도 밥을 지을 때도 청소를 할 때에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란
성가를 부릅니다. 손바닥만한 연립주택의 뜰에다 온 힘을 다하여 예쁜 꽃씨를 뿌리고 하루하루
꽃들을 가다듬고 찬송가를 부르며 꽃 넝쿨을 위로위로 올려줍니다
그녀에게 삶이란 외로운 함정도 가망 없는 절벽도 아니며 신에게 예쁜 꽃을 바치는 봉헌의 예식
입니다. 그녀에겐 노인네들의 혼자 사는 청승도 저주도 없습니다. 그녀 여생의 나날 위에
아름다운 수실로 평화의 무늬를 놓아주는 것 같습니다.
우미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 미술 관람을 하는 일, 마치 화단을 가꾸는 할머니를 연상케 합니다.
각자의 마음 화단에 유난히 풍성하고 비옥한 꽃들이 피는 것은 바로 우미갈이라는 작은
마음의 모임이 있어서 더욱 더 빛이 나는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임 안에는 늙어서 투명해진 할머니의 착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 투명한 혜안 안에는 참을 수 없는 위기 안에서도 슬기롭게 행복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미갈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나는 즐거운 미사의 시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7월의 향연이 끝났습니다.
8월이 기다려지는 건 행복함을 마구 전해줄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적이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얘기했던 그 누군가의 얘기를
떠올리면서 우리의 우미갈 카페의 결속을 정모를 통해 기적을 만들어 봤으면 합니다.
이번에 모여주셨던 40여명의 우미갈 식구들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우미갈 운영위원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