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지나가고 벌써 내일 모레면 한가위 명절 입니다. 중추가절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회귀본능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바로 인간적인 정감을 확인 시켜 주는 고향이란 곳이고, 다른 말로는 "품"이란 곳일수 있겠습니다.
고향, 품,... 누구나 그리워하는 본원적인 삶의 안식처일 것 입니다. 마음을 편히 쉴 곳은 공간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으며, 무형의 추상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면, 그곳은 고향이거나 동경하던 곳일 것이고. 시간의 의미를 지닌다면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깃들인 그 언제일 것 입니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정확하게 단정짓지는 못하여도 마음이 평온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니 고향의 품이든, 가족의 품이든, 사랑하는 연인의 품이든, 우리들은 누구나 "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길을 찾아 나선다는 것, 결국 "품"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추석도 결국 내가 지닌 그 무엇의 "품"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네요 "품"은 길의 끝에 존재하는 것일테고. "품"을 찾는 순간 우리들의 길 찾기는 마무리 될 수 있을테니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블친 여러분들 찾고자하는 길위에 평온함과 행복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연히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나온 아주 오래된 엽서 한장 뜨거웠던 한때의 추억같은 다큐멘타리가 스쳐간다. 잊으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마음에 새로운 것을 채우면 자연스레 옛생각이 밀려나겠지,
편지를 유난히 좋아하던 나는 편지를 받는 것 보다는 쓰는 것을 좋아한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내 버릇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나는 여행하는 도시에서 그림이 든 사진엽서를 자주 산다.
언제나 산 엽서에 빈칸을 빼곡 채우며 사연을 쓴다. 그리워하던 내 마음의 속앓이는 마를린 먼로의 치마폭처럼 너풀거리며 너울너울 편지에 펄럭인다. 아침이면 편지를 부쳐야겠어. 밤을 새우며 칸을 채운다.
아침에 우체국을 물어 보는 것은 너무나 즐겁다. 길을 묻고 걸어 우체국으로 간다. 편지를 들고 가급적 나는, 일부러 조금 먼 우체국까지 찾아 가서 편지를 부친다.
그만큼 더 오래 사연을 가슴에 품고, 먼 길 만큼 더 오래 마음의 부스럼을 쓰다듬다가, 이별의 편지와 좀더 잘 헤어지기 위해서이다. 그리운 내 사연과 헤어지는 우체국을 물어 보는 것은 너무나 즐겁다.
도시 모퉁이의 우체국 문을 열면, 그곳은 언제나 작별하기 좋은 냄새가 있다. 이상하게 어디건 응달진 우체국 냄새가 코에 와 안긴다. 어쩐지 눈썹에 맺힌 눈물 냄새가 나는 우체국 안에는, [작별하기에 좋은 냄새]인, 꾹꾹 눌러 찍은 세월의 스탬프가 편지의 가슴마다 박힌, 이별의 냄새가 난다.
오늘은 정말 오래간만에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 조용필이 부른 것은 아니고 다른 누군가 리메이크한 것 같은데.. 불후의 명곡인가..아니면 나가수에서 부른 곡인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노래탓인지 내 나이탓인지 몰라도 원곡에 한참 못미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친한 지인을 만났을때 조용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던 기억이난다. 왜 조용필은 지금에와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는데 나름의 결론은 조용필의 음악이 어느 장르에 두기 애매한,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장르명이 '조용필'이 될 수밖에 없는 "조용필음악"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시류와 유행에 쓸리지 않고 음악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찾아 듣는 그의 음악에는 성찰적인 가사가 많다. "바람의 노래"는 그가 만든 노래는 아니지만 꼭 스스로 썼을 것 같은 느낌이 난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에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오늘 지인께서 요즘 왜 글을 안쓰냐고 여쭤보시더군요? 그냥 쓸게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주위에 뭔가 쇼킹한것도 없고 글로 옮겨낼만큼 내마음을 움직일만한 일도 없다는게 불편한 진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답변이 타당한것인지 생각해보니 터무니없는 항변은 아니였나 싶습니다. 꼭 글이라는게 일상화된 이야기를 쓰는게 아니라면 그 어느것이라도 주제를 잡아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의 압박이 나를 움켜쥐더니 갑작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난김에 이 가을 정서에 맞는 뮤직에세이 하나를 쓴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오늘 점심을 먹고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 앞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우연히 바라보게 된 빌딩의 옥상,
빌딩도 아가미를 움직여 숨을 쉬어야 하는 숨구멍이 있어야 하나 봅니다. 가을 태양빛 따가움에 떨어지는 지붕 한쪽에 돌고 있는 환풍기 팬이 달린 지붕(?) (적절한 표현이 생각안나네요) -..-;;,
숨어있는 고양이 처럼 빙글빙글 돌고있는 환풍기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큰 숨을 쉬어보고싶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환풍기.. 나는 그 돌아가는 환풍기를 보면서 인간이 지닌 욕심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은 왜 만년 결핍 상태처럼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욕심을 낼까요? 빛에는 어둠을, 행복에는 슬픔을 각오하는 게 좋다는걸 왜 깨닭지 못하는 걸까요? 그곳에 긴장이 없어서 일겁니다. 그곳엔 의식이 없어서 일 겁니다,
설령 인식을 한다해도 그 의식 뒤에는 이율배반과 이원대립을 빚어내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해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때문일 겁니다, 저역시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 눈을 한번 질끈 감아보자.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만년 결핍의 욕심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의 도피일뿐.. 의식의 갭이 메워지기는 커녕 점점 불안으로 다가오는걸 느낍니다, 갈갈이 찢겨진 자신의 수치스런 깨닭음은 한장의 거울이 되어 내게 다가옵니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거울이 나를 바라봅니다. 처음부터 거울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것입니다. 거울이 깨닭음을 주었습니다,
너무나 인위적인 틀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건 아닐까? 세상을 보고 사물을 이해한다는것. 그것은 아주 좁은 문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아주 다른 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본질과 현상은 그래서 다른것은 아닐까? 어쨋든 약속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틀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에 아무도 노래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노래를 했을것이고. 처음에 아무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했을것입니다. 아무도 미술이라고 이름 짓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혹은 호모 사피엔스들) 무엇인가를 그렸을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나무가 그렇고 구름도 그랬을겁니다. 어느때인가 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구름이라고 불렀고 또 미술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아무도 처음에는 꽃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장미라는 이름도 수선화도 코스모스도, 어느 순간에 어느 누구에 의해 그렇게 불려졌을 겁니다.
우리가 그 사물들에 이름을 붙히기 시작할때부터 생각은 좁혀지고 사고는 제한 된 것은 아닐까? 나뭇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처절하고 가련하고 허전하고 쓸쓸한 것들이 '참을 수 없도록' 넘치는 세상입니다. 나뭇닢 한 이파리가 가지는 무게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닳은 것도, 마음을 사위며 아파했던 세상의 난간에서 체득한 깨닳음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숨을 쉬어야 하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수평선너머 아득한 희망처럼 이따금 빛바랜 추억처럼 그렇게 문득 기억의 방문을 열고 내게 이야기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 그래 쉬어야지...
마음의 불안을 씻으니 가을 속 태양은 나를 향해 웃습니다, 그래요 가을이 왔지요. 예쁘게 연필을 정성껏 깎는 기분으로, 새공책에 새마음을 써야할것 가을. 이 가을에 맞는 음악 한곡 같이 들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가을이라는 계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를 꼽으라면 첼로가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내가 이야기한 인간의 결핍을 잘 보완 해주는 악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이올린처럼 가파르게 날이 서 있지도 않고 콘트라베이스처럼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은, 절묘한 중용의 품격과 무게를 지닌 가장 인간적인 냄새를 지닌 음색의 현악기라고나 할까요?...
뭐, 첼로에 대한 특별한 옹호론을 펴자는 것은 아니고요. 역시 가을 하면 저는 우선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같은 드보르작의 작품이라도 저는 <신세계 교향곡>보다는 첼로 협주곡 쪽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신세계 쪽은 왠지 전체적으로 그 정서가 들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드보르작 본연의 성정이 온전히 발휘된 작품으로 분류하기에는 아무래도 곤란한 요소가 있지 않은가 싶어서요.
물론, 제가 주로 듣는 것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입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1969년에 협연한 것의 녹음인데요,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시기여서인지 음질이 상당히 좋습니다. 그 음원을 제가 가지고있지요, 아주 오래전 CD도 가지고 있었고요.
단, 이것은 파플로 카잘스가 조지 셸이지휘한 체코 필과 1937년에 협연한 판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뭐, 두 사람 다 워낙 대단한 거장들이라 사실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는데, 음질의 차이가 너무 커서 마음과는 달리 저절로 비교가 됩니다.
카잘스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오리지널 디지털 녹음으로 발매되는 음반들의 음질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거기에 귀가 익다보면 모노로 녹음된 음반들은, 아무리 나중에 디지털리 리매스터링 되었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선뜻 듣게 되질 않습니다.
그래도 스테레오 정도는 되어야 귀에 들어오지요. 모노의 경우는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교향곡이나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쯤 된다면 모를까, 굳이 애써 찾아 듣게 되지를 않는 거지요.
그래도 카잘스의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은 그나마 이따금씩은 듣는 음반입니다. 오케스트라 부분은 몰라도 카잘스의 첼로 연주만큼은 듣다보면 모노 녹음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만큼 풍부한 정서적 울림이 있거든요.
하지만 역시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연주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에 로스트로포비치 쪽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합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화려하고 음영 짙은 오케스트라의 선명한 음색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먼 미래에는 모노 녹음도 스테레오 수준의 음질로 복원이 가능할 만큼의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만... 모노 시대에 워낙 역사적인 명연들이 많아놔서 말입니다...
이음악을 들으며 생각나는 것은 바로 사랑 할 순간이 오는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해야지, 사랑하여야 겠습니다. 낮이 있고 그래서 밤이 오듯이, 미움을 삭히기 위해서 기도가 있는것 처럼. 알지못하는 가을빛이 천지를 진동하며 빨갛게 익힘을 주는 장사의 힘같은, 강렬한 숨소리를 통해 사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열정의 힘은 정직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이 순수한 동기를 잘 알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정이 보배보다 귀하다라는 것을 깨닭은 지금 삶의 의미를 부여 받으니 기분전환도 필요할 것 입니다, 목적이 제시되니 쾌락도 필요 할 것입니다, 과거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고 현재를 살아 갈 수있을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을을 어떻게 지내실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