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토요일..
오랜만에 답답함과 목마름을 풀고싶은 마음이였을까?
체코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이란 주제를 가진 미술 전을 다녀왔다.
긴겨울을 지내고 아직은 물이오르지 않았지만 멀리서 봄의 표정을 짓고
어머니의 품안같은 느낌의 다정다감한 정서가 덕수궁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미지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보헤미안의 나라..
우울한 열정의 프란츠 카프카와 모짜르트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모짜르트가 연상이 되었을까?


한편의 영화처럼 멋스러움을 한껏 품은 프라하를 모짜르트는 너무나 사랑했다고 한다,
남녀의 애잔한 사랑을 그린 오페라 돈 조반니를 모짜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아닌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을 한 역사적 배경때문일까?


내가 갖는 체코 프라하의 이미지는 빨간지붕의 도시가 아니라 소극장 마리오네트 형식의
인형극이나 연극으로도 시연되는 돈조반니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예술적 자취를 찾게해주는 인문학 감성의 거장 란츠 카프카의 심판..
그리고 밀란쿤테라의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
드라마 광인 나로서는 전도연 주연의 프라하 연인이 내 머리를 더 가득채운다.


이런 연상 작용때문일까?
한껏 기대를 품었지만 생각보다는 너무나 어둡고 힘든 동구유럽의 전형적인 아픈 세월의
흔적을 보고 나온 듯 하다.. 어디론가 낮이없는 어둠의 세계로 유페되어 버린 느낌이였다고나 할까?


밀라노 제라스가 쓴 "새로운 계급이란" 책 주인공 제라르가 본 프라하의 1968년 8월의 그날같은
느낌을 받음은 무엇일까? 제라르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나는 그 미술관 모퉁이에서 물끄러미
제라르의 뒷모습을 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나를 위안한 것은  프란티세크 쿠프카의 "건너편 강둑" 이라는 유채 그림 한점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마치 그림속 그강은 체코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포용하고 품어내어 조용히 빠지게 만드는 힘을 보여주는듯 하다.
고통은 마치  500도 고열의 용광로와 같은 인간 실험실이 아닐까싶다,


고통을 당하는 순간은 아프고 미칠 것 같지만 슬기로운 의식으로 그 아픔을 깨닫고 고통의 의미를
내안에 승화하여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면 , 그 고통은 진리의 심부름꾼이 되고 진리를 각성하는
더없이 귀한 원천이 되는게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그러기에 오늘날 자유를 찾은 체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비구상적인 추상화나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을 싫어하는 내게 자꾸 환상을 강요하는 것은
왠지모를 거부감과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총맞은것 처럼의 그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듯 싶다.

 

그래도  그 시대의 체코 미술작가들은 나름 그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려는 희망을 적극적으로

표현 해준것이 작은 풀한포기 하나가 점점 지평선상의 평화로운 나무로 커져 하늘을 가득메우게 한

원동력이였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행복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화사한 햇살속에 봄을 맞고자 설레이며 서있는 내모습을 본 것 같았다.


우리 인간은 캄캄한 밤이 다가와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틀림없이 제 시간에 찾아올 새벽의 입김과
태양의 빛을 믿으며 기다리는게 아닐까싶다.  봄을 기다리는 덕수궁 한곁의 나무들,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가 매운 바람에 씽씽거리며 울지만 빛무리 일렁이는 그날이 오면 오늘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의

미술전에서 보았던 그 시대의 작가들의 예술을 위한 혼을 다시한번 느끼지 않을까싶다.


그곳에 전시해놓은 작품이 107작품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작가나 그림 생각이 잘 떠오르지않음은
그림 관람을 방해하는 요소중에 하나인 그림 구경왔으니 잔말말고 그냥 그림 구경이나 하다 가라고
만들어놓은 성의없는 동선 배치가 일단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림 관람을 충실히 하려면 이것저것 신경써 봐야만 해서 충실한 관람을 저해하는 요소였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직 못가본 분들은 문화적 공감을 위해서라도 나드리를 해보면 어떨까싶다.
아마 이번 주말쯤되면 봄바람 콧바람이 덕수궁 한자락을 더 깊이 불어오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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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인가 모임때 쵸코렛 선물을 받고 횡재했구나 하던 모습입니다.)

 

 

단 음식, 좋아하세요?
저는 단 음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초콜릿만은 예외랍니다.
특히 제가 열광하는 음식은 초콜릿무스죠.
입안에 퍼지는 부드러운 느낌과 한 입 베어 물때 코끝까지 느껴지는 고소함.
신들의 열매인 초콜릿은 그 지대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켜 온 것 같습니다.


초콜릿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달콤함.
그건 일종의 어떤 해방감속에 피어나는 사랑은 아닐까요?


오늘이 발렌타인데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들은 하셨고 받으셨는지요?
개인적으론 죽을 쑤고 싶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었지만 기분은 참으로 더럽더군요.
누가 만들었길래 쵸코릿 하나로 이리 기분을 좌우하게 만드는 것인지?

  
사랑에 관한 담론은 그 어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이론보다 흥미롭지요.
뉴턴의 위대한 발견보다,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학자들의 방대한 이론서보다 우리를 자극하고,
구미를 잡아당기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욕심 많은 神이 만들어낸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내 무의식 어딘가에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하나씩 줄어 들수록 늘어나는 것이 사랑이란 욕심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나이가 들어 주책이라 하겠지만 이런 날 들이오면 막연한 기대감에 마음을 설레는 것은
아직도 낭만을 가슴에 품은 탓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비록 몸이 힘들고 스트레스 속에 살지만
마음 안에 풍성히 담긴 그 낭만만은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록 오늘 쵸코릿 한 개도 못 받은 바렌타인 데이지만 삶의 아니러니 속에서 자그마한 기대감과
흥분 감을 준 발렌타인데이에 감사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흥분되는 날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흥분됨을 가진다는 것, 설레임을 가진다는 것

참으로 몸에 좋은 영양제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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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님들
설 명절은 잘지내셨는지요?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손을 뻗치면 닿을 듯 닿을 듯한 곳에 있는 듯 하지요?
아주 멀리 있을수도 있고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답니다.


아주 멀지만 가깝다고 느껴지는건 뭐가 있을까요?
저는 이번 명절을 지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못한 친구들?
아주 오랫동안 보지못한 친척들?
아주 오랫동안 보지못한 지인들?


이들은 어찌보면 멀게 있지만 또 가까이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명절이 오기전부터 안부겸 새해인사겸 이곳 저곳에 단문의 메세지를 많이도 보낸것 같습니다.
게중에는 제게 소식을 보내온 분들도 있고 요즘 말로 쌩까고 답변도 없는 분들도 있더군요


손을 뻗으면 저하늘에 걸려있는 별처럼 가깝게 느낄수도 있을 것 만 같은데
소식을 전하지 않은 분들은 왜 답변조차 없었을까 내심 불안하기도하고 섭섭하기도하고...

 
멀리 있지만, 눈에 보이고 손을 뻗치면 닿을 것 같아, 결코 먼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인데
내눈앞에 있다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그 거리가 좁혀질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싶네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그 관계가 아름답게 빛이날지도 모른다는 자의적 해석을 해봅니다.


손쉽게 얻을수 있는 것이라면 그 가치가 가벼울 것이고 아마 아름다움은 빛이 바랠 것 입니다.
동화는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것들이 이루워지는 공간이지만 현실 속 관계의 삶이란
그와같지 않아서 그런 동화의 세계를 진실로 믿었을때 낭패하기가 쉽상일 겁니다,


하지만 삶이 그와같다해서 그 꿈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버린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비록 우리네 관계가 문자 메세지 하나로 다 성립될 관계는 아니지만 상상하는 순간 만큼은
고단한 현실의 이기적인 관계에서 잠시나마라도 평온해질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저와 이웃하고 있는 친구분들...
망설이지마시고 서로 소식을 전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네 인생사 수직적.수평적 질서가 있고, 아군과 적군도 있고,
반목과 싸움도있고, 사랑과 미움도 상존하지만 삶의 저물녘 뒤돌아봤을때
웃음 지을수 있는 세월의 눈금이 세겨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절을 지내고 푹쉰탓인지 첫출근을 한 오늘..
하루종일 하는일없이 삶에대한 매듭은 없는지 살펴본 날이 되었습니다.
지독하게 누군가를 그리며 살아가는 내 생활 공간속에 들어온 지인들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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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 그리고 현실

 

굳이 장주(莊周)의 나비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실과 꿈의 혼동,
그리고 이 둘의 상호 영향관계는 늘 익숙하다.
아무 말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연인의 모습을 꿈에서 본 후,
헤어지자는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었던 기억과
어머니의 뒤숭숭한 몽조에 걱정 끼칠까 싶어 약속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리고 며칠 전, 어깨에 기대어 흘린
사랑했던 그녀의 눈물 세 방울. 그 빛나던 세 방울이 옷으로 스미지 않고
동그랗게 맺혀있지 않았다면 꿈이 아니라 기억 됐을지도 모르는 미련한 마음.   
 

2. 공간


소설의 주인공 ‘나’ 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의 끝’이라는 도시와
‘나’의 실재 삶의 공간인 원더랜드. 이 두 세계는 마치 꿈과 현실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서로에게 간섭하는 평형한 세계이다.


그리고 이 평형한 세계를 넘나드는 매개인 일각수.
일각수에 대한 신화적 상징은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서술하지만,
그저 환상성을 증대시키는 소품으로 이해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소품의 기능과 일각수의 신화원형적 기능과의
거리가 다소 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의 빛나는 능력은 ‘원더랜드’의 모습을 기묘한 세계로 묘사한 점이다.
세계의 단순화로 볼 수도 있을 ‘세계의 끝’보다 어쩌면 더 이상한 ‘원더랜드’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이 병행하는 두 세계의 이야기가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시간 
 

시간의 문제. 병치하고 있는 두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번갈아가며 각 세계를 서술하고 있으니, 동시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이 잠들어버린 이후, ‘세계의 끝’에서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기도 하다.


물론 내용상 역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원더랜드'에서 잠들어 버린 시점이 '세계의 끝'의 구덩이 앞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시점인지 혹은 '세계의 끝'에 입성하는 시점인지 쉽게 알 수 없다.
두가지 가정을 열린 구조로 내버려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백과사전 막대기’를 설명하는 노박사의 말을 빌어 넘어가기로 했다.


사념에는 시간이란 게 없네, 그게 사념과 꿈의 차이점이지.
사념이란 한 순간에도 모든 걸 볼 수가 있지 영원을 체험할 수도 있어
폐쇄 회로를 설정해 놓고 그 곳을 계속해서 빙빙 돌 수도 있네.
그건 게 사념일세. 꿈처럼 중단되는 일은 없지.
그건 백과사전 막대기와 비슷하네. (2권 p.157)」 

 

4. 죽음


하루키는 결말을 두고 대단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할 것인가?
(전작인 중편『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그림자와 함께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의 결말처럼 그림자와 분리되어 그녀와 함께 숲으로 떠날 것인가?
나는 그림자와 함께 ‘원더랜드’를 탈출한 쪽의 결말을 상상해보았다.

 

하루키 역시 이를 고려했기 때문에 ‘인체냉동’과 ‘노박사의 피신’을 설정한 것이리라.
그랬다면 하드보일드하긴 하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상상은 독자의 소유이고, 결말은 작가의 것이다.


결국 저자는 그림자와의 분리를 선택했고 나는 이를 ‘나’의 죽음이라고 이해했다.
세계의 종말보다 늘 먼저 찾아왔던 개인의 종말, 바로 죽음인 것이다.
사념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라니 사념 속에서는 자아가 영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사과가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 세계의 마음을 버리고 평정심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세계는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5.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것은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관념과 실존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탄한 작품 안에서 관념과 서사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들고 있는 저자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늘 그렇듯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관념을 늘어놓다가도 성(sex)에 대한 이야기를 양념치듯 섞는

- 마치 어느 명강사의 졸음방지 교수법처럼- 하루키의 방식에도 웃으며 박수를 보낸다.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가 된 예는 긍정하지만 이 작품을 ‘일각수의 꿈’이라

칭하는 것에는 별로 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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