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심에 돌을 던져 다시 고요해지기를 지켜보는 마음,
아프지 않은 날보다 아픈 날들이 더 많았지만 스스로 타이르며
끄덕여보는 지금의 심정.


인간의 영역 속에는 여러 성질이 있는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투철한 목적의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만
열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기주의적 발상일 수도 있고 서로 처지를 알아 나눔을 주는
대상일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내 성향이 타인에게 배려를 우선하다보니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지 못해

생기는 불상사가 그동안 있어 일에서 만큼은 좀 냉정해져야 겠다

생각해서 서로의 의견차이를 가지게 된 상황,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상대 입장 역시 관계에 있어 신뢰에 근본을 두고
만나겠지만 깊은 저면, 헤아릴 수 없는 인간 마음 속 심연이 복잡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동안 지지부진 했던 평창리조트 광고 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분양에 필요한 광고 시안작업은 진즉 에 해놓고 비용문제로 인해
가슴앓이를 꽤나 오랫동안 했는데 오늘에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야속하게 한 일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내가 섭섭했던 것 이상으로
상대가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너무 못 믿고 일 진행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질타를 감수하고
지금껏 참은 것은 일을 해주고 나중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발생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돈이 사람을 속이지 사람이
돈을 속이겠는가 하는 말, 혹 내가 잘못된 사회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반성을 해본다.


간단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간단하게 치부될 일을
이리 복잡하고 마음 상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수양 부족 탓일 텐데.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랜다고
내 친구가 하는 사업에 너무 냉정히 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내내 켕긴다.


마음과 마음에 장벽을 쌓아놓고 손해보지 않고, 속지 않으려고 영악한 모습을
보인 내 자신이 허세의 분가루처럼 지금 이순간 피폐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각의
눈이 열려서 그런 것일까? 더욱 더 마음으로 아끼는 친구가 되어 힘껏 살
용기를 주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지나친 욕심을 부린 것 같아 친구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당분간은 일로 인해 마음도 몸도 바쁠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감사한 것은 나의 믿음을 믿어준 친구에게 고맙고 이제라도

늦은 감이 있지만 일 추진이 원할하게 잘되어 목마름을 해소 할 수 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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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러그를 찾아 글을 올리는 것 같다.

몸도 아프고 생활도 별로 변화가 없고 하다보니 블러그에 글을 쓸 이벤트가

없었다는게 딱 맞는 말일 것이다.

 

사실 이번달 독서모임 발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할 입장인데

아무리 책을 구입하려 하여도 절판이되어 살 수가 없다.

대형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등.. 여러곳을 찾아 다니고

그래도 열성을 보였으나 결국 책을 구입할 수 없었다.

 

결국 아주 오래된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와 읽게된 책이 바로 칼잡이...다.

사놓고 방치되어있다가 눈에 띈 책인데 뒤늦게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인셈이다.

독서모임 발제 책을 못읽어 맹하니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는하나

그래도 오랫만에 독서부담에서 벗어난다 생각하니 홀가분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작가와 칼잡이들의 이야기를 한 데 묶어둔 책이다.
작가는 각 단편이 짧아서인지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서 모호한 느낌을 받는다.
‘꿈의 호랑이들’에서 꿈을 조작함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못하는 상황에 동감했다.
보르헤스도 그랬구나.


‘한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이다. ('마르틴 피에로’ p.46)


김지하는 틈에서 "인간의 뇌수 속에는 파충류 적 기억까지 살아있다."고 말했는데,
같은 말이거니 생각했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운동하는 이야기이다.


"저기 그들이 온다. 신들이, 신들이." 그리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신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다."(’꿈‘ p.61)


그러나 인간 보르헤스가 창조한 신은 말한다.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전체와 무’p.59)


칼잡이들의 이야기는 불한당들의 세계사와 밀접하다.
살인의 주체가 인간에서 "단검"으로 바뀌고 (만남),
단검은 카인의 돌맹이로 "예수의 십자가"로
링컨을 쏜 탄환으로 윤회한다 (케네디를 추모하며).
그리고 결투가 꼭 단검이나 장검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투)

 
주체와 객체의 혼돈이 매우 새롭다.
"부르디의 보고서"는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하동"을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걸리버여행기"로 눈길을 돌린다.


"끼어든 여자"는 불의의 정당함과 가우초적 태도에 대해.
"마가복음"은 충격적 결말에 감탄하였다.

허나 거장 앞에 쫄지 말아야 한다. 내가 생각한 마지막 소신이기도하다.ㅋㅋ

이런 자괘감이란...??

 

 

어떻게 사랑이 당신을 찾아 왔습니까?
환한 대낮처럼 꽃보라처럼 왔습니까?
혹은 한 가닥 기도처럼 왔습니까 말해 주세요.


R.M 릴케의 사랑이라는 시 서두부분이다
어제 사랑하는 후배 하나가 우리에게 깊은 사랑을 나눠주고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을했다.
 

비맞고 물든 단풍, 아픈 선홍이라는 말이 어제는 그리도 잘맞는 말인지?
서정주 시인의 노래처럼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는 말,
우리네 추억과 지난날 우정과 사랑을 뒤로한채 후배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영원히 만지지도 볼수도 없는 곳으로 슬픈 사랑을 그려내듯 떠나고 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 작년에는 내친구가 심장마비로 본향을 향해 먼저 떠나더니
아이러니하게 올해는 후배가 먼저 세상을 떠나 갔다.
짧은 세월이였지만 후배와의 만남의 추억이 생생한데 한줌의 흙으로 보내지다니
이럴때마다 인생은 무엇인지. 왜 사는 것인지.. 생로병사의 근원이 화두가 되어진다.


쌓아올리고 허무는 일의 무수한 되풀이 속에 평생을 거미줄치듯 산다고해도
천수를 누리는 기쁨은 모든이들의 잠시 아픔으로 승화될 수 있지만 젊은나이에

못다한 삶의 비탄은 살아 생존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아픔과 힘듬을 주는 것 같다.


삶은 고해를 건너는 일이며 유순한 번뇌를 참는 일이지만 죽음은 결코 낭만이
아닌 것 같다. 어제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림틀속에 갇힌
답답한 풍경의 그 모습 그자체였다. 상실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가을계절의 애상처럼...
허술한 틈서리마다 후배와 지냈던 지난날의 회상을 부채질 하고...
후배의 떠남을 아쉬워하 듯 바람도 스미고 비도 뿌렸으니 그안에 서있는
나의 아픔은 무상의 강물위를 걷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스로의 아픔에 숨이 막힐 듯 어지럼증이 하루를 보낸 지금도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강린아...
너를 괴롭히던 슬픔을 헤쳐주지 못해 미안하고 네가 가고 없는 지금,
말만 어수선히 많아서 부끄럽다. 너와 지냈던 많은 추억과 못잊음을 언제까지라도
가슴에 품으며 지켜줄께, 아주 오래오래 내 기도 속에서 너를 기억할께,


고독이 자욱한 벌판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연기처럼 바람이 온다,
혹은 공기라고 할 지, 필시 나의 본향에서 오는 기류일 게라고 조용히 수긍을 한다
너는 비록 곁을 떠났지만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보며 살고 싶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도 향유인 양 고귀한 선물처럼 반기고 아끼고싶다.
모짜르트의 레퀴엠 한곡이 네가 가는 영원한 안식의 기도로 위안이 되었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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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진 통신 수단이 인간의 뇌들을 멀티 드라이빙으로 연결해 준다는 것은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어쩌면, 과학이 발달하고 인터넷과 같은 통신 수단이 점점 빨라지는 것은,
우리가 그 남는 시간의 여유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한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더 바빠지기만 하는 것일까?
늘 시간이 없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내용물로써의 자신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채플린의 ‘모던 라이프’가 보여주었던 어두운 눈자위가 떠오른다.
한 때 도시의 중심에 서 있던 내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시인들은 진화해 간다.
나의 진화 역시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점점 발달해 가는 과학기술로 아껴지는 그 시간을,
우리는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다가 아낌없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먼저 우리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라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명제 앞에 숙연해지면, 조금 더 숲에 가까워 질 지도 모른다.


오늘도 숲은 비어있다.
아침 햇살은 얼굴을 간질이고 나이든 참나무 아래의 흙을 밟는 발소리는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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