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블러그를 찾아 글을 올리는 것 같다.

몸도 아프고 생활도 별로 변화가 없고 하다보니 블러그에 글을 쓸 이벤트가

없었다는게 딱 맞는 말일 것이다.

 

사실 이번달 독서모임 발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할 입장인데

아무리 책을 구입하려 하여도 절판이되어 살 수가 없다.

대형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등.. 여러곳을 찾아 다니고

그래도 열성을 보였으나 결국 책을 구입할 수 없었다.

 

결국 아주 오래된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와 읽게된 책이 바로 칼잡이...다.

사놓고 방치되어있다가 눈에 띈 책인데 뒤늦게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인셈이다.

독서모임 발제 책을 못읽어 맹하니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는하나

그래도 오랫만에 독서부담에서 벗어난다 생각하니 홀가분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작가와 칼잡이들의 이야기를 한 데 묶어둔 책이다.
작가는 각 단편이 짧아서인지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서 모호한 느낌을 받는다.
‘꿈의 호랑이들’에서 꿈을 조작함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못하는 상황에 동감했다.
보르헤스도 그랬구나.


‘한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이다. ('마르틴 피에로’ p.46)


김지하는 틈에서 "인간의 뇌수 속에는 파충류 적 기억까지 살아있다."고 말했는데,
같은 말이거니 생각했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운동하는 이야기이다.


"저기 그들이 온다. 신들이, 신들이." 그리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신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다."(’꿈‘ p.61)


그러나 인간 보르헤스가 창조한 신은 말한다.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전체와 무’p.59)


칼잡이들의 이야기는 불한당들의 세계사와 밀접하다.
살인의 주체가 인간에서 "단검"으로 바뀌고 (만남),
단검은 카인의 돌맹이로 "예수의 십자가"로
링컨을 쏜 탄환으로 윤회한다 (케네디를 추모하며).
그리고 결투가 꼭 단검이나 장검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투)

 
주체와 객체의 혼돈이 매우 새롭다.
"부르디의 보고서"는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하동"을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걸리버여행기"로 눈길을 돌린다.


"끼어든 여자"는 불의의 정당함과 가우초적 태도에 대해.
"마가복음"은 충격적 결말에 감탄하였다.

허나 거장 앞에 쫄지 말아야 한다. 내가 생각한 마지막 소신이기도하다.ㅋㅋ

이런 자괘감이란...??

 

 

어떻게 사랑이 당신을 찾아 왔습니까?
환한 대낮처럼 꽃보라처럼 왔습니까?
혹은 한 가닥 기도처럼 왔습니까 말해 주세요.


R.M 릴케의 사랑이라는 시 서두부분이다
어제 사랑하는 후배 하나가 우리에게 깊은 사랑을 나눠주고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을했다.
 

비맞고 물든 단풍, 아픈 선홍이라는 말이 어제는 그리도 잘맞는 말인지?
서정주 시인의 노래처럼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는 말,
우리네 추억과 지난날 우정과 사랑을 뒤로한채 후배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영원히 만지지도 볼수도 없는 곳으로 슬픈 사랑을 그려내듯 떠나고 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 작년에는 내친구가 심장마비로 본향을 향해 먼저 떠나더니
아이러니하게 올해는 후배가 먼저 세상을 떠나 갔다.
짧은 세월이였지만 후배와의 만남의 추억이 생생한데 한줌의 흙으로 보내지다니
이럴때마다 인생은 무엇인지. 왜 사는 것인지.. 생로병사의 근원이 화두가 되어진다.


쌓아올리고 허무는 일의 무수한 되풀이 속에 평생을 거미줄치듯 산다고해도
천수를 누리는 기쁨은 모든이들의 잠시 아픔으로 승화될 수 있지만 젊은나이에

못다한 삶의 비탄은 살아 생존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아픔과 힘듬을 주는 것 같다.


삶은 고해를 건너는 일이며 유순한 번뇌를 참는 일이지만 죽음은 결코 낭만이
아닌 것 같다. 어제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림틀속에 갇힌
답답한 풍경의 그 모습 그자체였다. 상실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가을계절의 애상처럼...
허술한 틈서리마다 후배와 지냈던 지난날의 회상을 부채질 하고...
후배의 떠남을 아쉬워하 듯 바람도 스미고 비도 뿌렸으니 그안에 서있는
나의 아픔은 무상의 강물위를 걷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스로의 아픔에 숨이 막힐 듯 어지럼증이 하루를 보낸 지금도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강린아...
너를 괴롭히던 슬픔을 헤쳐주지 못해 미안하고 네가 가고 없는 지금,
말만 어수선히 많아서 부끄럽다. 너와 지냈던 많은 추억과 못잊음을 언제까지라도
가슴에 품으며 지켜줄께, 아주 오래오래 내 기도 속에서 너를 기억할께,


고독이 자욱한 벌판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연기처럼 바람이 온다,
혹은 공기라고 할 지, 필시 나의 본향에서 오는 기류일 게라고 조용히 수긍을 한다
너는 비록 곁을 떠났지만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보며 살고 싶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도 향유인 양 고귀한 선물처럼 반기고 아끼고싶다.
모짜르트의 레퀴엠 한곡이 네가 가는 영원한 안식의 기도로 위안이 되었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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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진 통신 수단이 인간의 뇌들을 멀티 드라이빙으로 연결해 준다는 것은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어쩌면, 과학이 발달하고 인터넷과 같은 통신 수단이 점점 빨라지는 것은,
우리가 그 남는 시간의 여유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한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더 바빠지기만 하는 것일까?
늘 시간이 없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내용물로써의 자신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채플린의 ‘모던 라이프’가 보여주었던 어두운 눈자위가 떠오른다.
한 때 도시의 중심에 서 있던 내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시인들은 진화해 간다.
나의 진화 역시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점점 발달해 가는 과학기술로 아껴지는 그 시간을,
우리는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다가 아낌없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먼저 우리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라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명제 앞에 숙연해지면, 조금 더 숲에 가까워 질 지도 모른다.


오늘도 숲은 비어있다.
아침 햇살은 얼굴을 간질이고 나이든 참나무 아래의 흙을 밟는 발소리는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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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유명한 광고 하나가 있다
카메라 광고로 기억이 되는데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간관 혹은 역사관을 함축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또 하나의 책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무라까미 하루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실제로 하루키 소설속 다자키 스쿠루는 이름속에 색채가 없기도 하거니와
본인 스스로는 자신은 색채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대부분의 평범함의 미덕은 자신은 중성적인 색이거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예감은 틀리지않는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토니는 말그대로
색채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고 그렇게 살아왔다.
다자키 스크루가 순례를 떠나기 전까지 그의 일상사와 다를바없는 평범한 토니,


사라가 스쿠루에게 순례를 떠나기를 종용하는 것 같이 토니 역시 40년이 지난후
베로니카라는 옛애인의 모친이 보내온 유산분배와 편지를 받기전까지의 모습과
그렇게 다를바 없는 것 같다.


이 두책의 기록이주는 메인 테마는 바로...
기억은 덮어 둘수는 있지만, 각 개인이 가지는 역사는 지울수 없다. 이다
다시말해 개인이 가지는 역사를 지운다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고
죽이는 것과 마찮가지라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두책의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통찰하고 회고 하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라고 번역했지만
노르웨이 숲에서 보여주듯이 상실감을 가진 자아가 점점 자신을 성찰 혹은 회고 함으로
회복해 나가는 그 과정, 역시 마찮가지로 토니나 쓰쿠루 두 주인공은 자신의 성찰과 회고를
통해 모든것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설속에서 보여준다.


성찰을 낳는 것은 아픔이지만 줄리언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소설은
부정과 자아의 상실를 통해 자신의 껍질을 깨는 성장소설과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껍질을 만들어 숨어버리기 보다는 과감히 껍질을 깨고 번데기에서 나비로 성장해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는 지울수도 다시 만들어 낼수도 없는 나 자신을 죽이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보면...

소설적 완성도와 비극적 테마..
비극적인 분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가 주는 분위기는 참으로 쓰라리고도 아름다운 뭔가 그런게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시간, 역사, 기억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에 짜넣은 작품이 아닌가싶다.
스스로 "평균치 인생"이라고 칭하는 삶을 사는 화자 토니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젊은 날의 기억
대학 때 잠시 사귄 여자친구 베로니카가 헤어진 후 자신의 친한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부터
이야기는 파생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토니는 상당히 기억력이 현실적인 것을 보게 되는데.
나 역시 토니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다.
어떤 것은 엉뚱하게 기억하고 어떤 것은 통째로 잊어버린다. 어떤것은 정말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잊혀지지않고 기억속에 머무는 것도 있다.
 

우리들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추억은 실제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밝기 마련이다.
그래서 죽을 것 같았던 아픔도 향수나 추억을 더듬어보면 이해될 수 있는
그리고 아프지만 그럭저럭 아름다웠다로 평가 내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늙은 토니가 자신의 기억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낸 1부를 이미 읽고
2부로 넘어온 기억과 다른 사실과 맞닿뜨린다.
그렇다보니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나 역시 통째로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몇번이나 앞으로 다시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삶이 이렇게도 모호하고 불분명한데 우리가 배우고 사실이라고
"믿고있는" 역사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 진실이라는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아니 어쩌면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한
"자기보존본능"에 의해 직조된 나만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내 말 한마디
혹은 행동의 돌덩이가 타인에게 미치는 파문을 나는 어떻게 조정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과 개인이라는 미시적인 조각을 모두 아우르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짧지만 깊은 소설이었다고 자평한다.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놓치기 너무 아깝다.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다양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 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홍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거의 명언의 반열에 오를만한 표현도 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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