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보통의 소설 속에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 중 하나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의 화자는 여자이며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이야기라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의 화자는 남자이며 나와 클로이의 사랑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펼쳐 나가는 사랑의 드라마이지만 시작과 전개는 대단히 흡사하다 아마도 모든 남녀의

운우지정.,. 사랑의 이야기는 이렇게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ㅋㅋ 그러나 각자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성과 감정들..

앨리스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클로이를 사랑하는 나와는 참 많이 다름을 느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느낀다고 나 할까?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여자가 이별을 하면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이 아니었구나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잊어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는 반면, 남자가 이별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미련을

곰탱이처럼 부리는 차이가 바로 여자와 남자의 관점과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싶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주 섬세한 사랑의 감성을 사유와 담론의 장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은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끌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이 책을 보면서 지독한 사랑을 해봤거나

혹은 사랑을 해보지 않았더라도 24가지의 이야기 속에 깊이 있는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사랑과의 차이는 뭘 까? 비교가 되는 의미를 주는 책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사랑이 끝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과정 끝나버린 사랑의 상처를 지우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유적인 관점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랑의 진행 과정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철학적 이론과 연관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있다는 점이 새롭다..


연애와 철학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인데 알랭드보통은 신선하게도 연애와 철학의

둘을 잘 엮어 이야기를 풀어 간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와 클로이의 만남.. 흔히들 로망으로 생각하는

비행기안의 조우.. 그리고 운명적으로 빠져버리는 사랑..

 

다른 연인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소한 싸움과 화해의 반복..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과정.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노래처럼 클로이와 주인공 친구인 윌과의 새로운 만남.

그리고 헤어짐.. 너무도 통속적인 사랑이야기 속에 페이소스와 사랑의 가치를 조금 더 성숙하고

가치 있게 표현해 내는 알랭드보통의 글의 구성은 마음의 짠함을 느끼게 만든다.


사랑이 끝나고 좌절과 우울의 나날. 자살 시도

(나는 과연 실연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할 수 있을까 갚은 고민?)

그리고 다시금 회생하는 과정.. 그리고 디너파티에서 만나는 새로운 운명 레이첼과의 만남.. 
일인칭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소재 그간의 통속적 소설의 구성과는

조금은 다른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어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책이다. 


연애의 심리변화를 작가의 일인칭 해설로 자세히 이야기 한다는 것.. 마치 연애 편지나 일기장을 훔쳐보는

관음증 같은 느낌으로 읽게 되는데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게 대체적으로 극적인 드라마 적

감정의 소비를 담은 일상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라면 이 책은 남녀 간의 사랑과 인간관계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알랭드보통만의 특유의 철학적 사변과 성찰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좀 더 인문학 적인 깊이와 섬세함이 깃든

소설이 아닌가 싶다.


아주 읽을 만한 책이고, 더구나 25살의 청년이 썼다는 게 아주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난 25살 때 뭐했나??

군대에서 뺑 이치고 복학을 할 때였나? ㅋㅋ 낭만적 운명론에서 사랑의 교훈이라는 24가지의 담론.
사랑을 할 때는 순수해지고 이별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성숙의 발전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사랑에 상처 때문에

사랑에 겁먹고 주저할 필요는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랑이라는 정의는 각 개인의 사유를 통해 여러 가지로

나타낼 수 있으나 통찰과 깨달음이 생기고 일상을 해석 할 수 있다면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담론..

  1. 내게 사랑이 찾아 온다면 어떻게 그 사랑을 받아 드릴 것인가?
  2. 정말 사랑은 운명론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3.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답 받을 수 없는 마르크스적 감정이라고 하는데 즉 목표를 성찰(섹스를 통한 합일이건 어떤 식이건) 사랑하는 사람을
  4. 소유하면 소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5. 상호간의 사랑은 진정 불가능한 것이고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시간의 감각도 흐릿 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요즘 세상과 대면하는 시간은
2~3일 간격 병원을 가는 일 뿐이다. 
 
10여일 째  한밤엔 고열에 시달려
금방 죽을 것 같다가 낮엔 파김치처럼
꼼짝 도 못하고 잠을 자고를 반복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뭘 잘못 먹어 장염으로
시작된 오해가 큰 병을 키운 셈이니
돌팔이 의사 선생을 나무라기엔 나의
무지가 한심스럽다. 
 
너무 병의 차도가 없어 2차 병원으로
옮긴 후 충격적인 진단, 장염이 아니라
폐렴으로 최종 진단, 
 
폐렴과 한바탕의 전쟁을 치루고 있지만
내가 이겨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간의 투여된 항생제 적합여부 폐렴의
진행상태를 검사 받고 적합 판정을 받았다

 

일단 안심이다..

이대로 일주일만 잘 버티면 폐렴은 안녕이다

정말 지겨운 열과의 싸움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모든 게 서먹하고 뭔가 새롭다.

늘 지겨워 하던 사무실이 정겹게 느껴지기 처음이다.

다시 시작이다.. 아자.. 기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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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바람이 제법이다
마음이 스산하다.
가을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젠장~
바람은 바깥에서만 부는게 아니고
가슴 밑바닥부터 불기 시작 하는 것 같다.
바람 부는 날은 세상이 흑백으로 그려진다. 
 
흑백으로 그리는 것이 컬러로 그려내는 것
보다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 이라고
그림 그리는 친구가 내게 얘기해준 기억이 있다. 
 
시각을 편안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강렬히 반응하게 만드는 색채도 없고
칼라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일까?

빛과 어둠이 조율된 하나의 대상.
삶의 양상을 그려내는 직선적 성향의 흑백.
감정의 이입이 없는 흑백의 깊이와 넓이는
편할 것 같지만 다가가기 두렵다.

객관적인 삶의 실체가 두려워지기
시작 하는 날,  카루소의 노래는 어떨까?
위대한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를 추모하는 흑백 같은 노래

루치오 달라의 카루소일까.
루이치아노 파바로티의 카루소일까?
절대 음감의 소유자 가수들..

그들이 뿜어내는 카루소의 느낌은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 수 있는 작은 가슴 같은
공간이 허용되는 아름다움이랄까?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리움을 표현하는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작은 밝음을 보는
서정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붉은색 와인 같은 처절함이
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루치오달라의 카루소를
리메이크 한 루이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카루소를 들어본다 
 
카루소 노래가사/ 
 
그는 목소리를 맑게 하여 노래를
다시 시작하네.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잘 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바다의 엷은 빛도 사라지고
아메리카의 밤을 생각하며.
나는 홀로 등불을 들고 방황하네 
 
하얀 뱃자국이  솟아 오르며
음악 속의 회한을 느낄때면
피아노 소리는 고조 되는데 
 
달빛이 구름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모습  부드럽지만
죽음을 닮고 소녀의 시선을 응시하면
그것이 바다와 같은 청록빛 
 
예기치않게 흐르는 눈물이
그를 숨막히게 하고  당신의 목소리는
아주 들떠서 나는 잘안다네
여기 하나의 사슬이 있어 그것이
풀리면 피가 흐르는 것을, 
 
ㅡ 중략 ㅡ

 

 

 

 

정말 오랜만에 뮤직에세이를 써봅니다.

작년 말에 글을 쓰고는 조용히 지내온 듯 싶네요. 어쩌다가 그리 됐는지 흑흑...


세상 끝에 오는 소리처럼 가을의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새로움을 전해 줍니다.

언제 여름이 있었냐는 듯.. 하나님의 여름은 내게 과중한 전기료만 잔뜩 빚으로 남기신 채

묵묵부답이시지만 계절이란 일관된 충실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그렇게 가을은 시작되고 8월의 마지막 날비가 내리기 시작 합니다.

엷은 풀 물을 바르듯 도로 위에 내 몸 위에, 내 눈썹 위에 조용히 마음을 적시며 내리고 있습니다.
비.. 왠지 그 비로 인해 쓸쓸하다는 느낌이 밑에 가라앉았던 외로움을 위로 솟구쳐 올려 보내는 것 같습니다.   

옷을 벗은 듯 갑자기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력하고 쉬이 절망하는 내 성격 때문일까요?

삶의 원리에 지쳐 쓰러지길 반복하는 내 생활 때문일까요?

심한 강박 관념이 조금은 허세를 보이며 위장하며 살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특별히 외로움을 극복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 외로움도 편안함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것은 모순의 덩굴에서 가끔은 나를 지극하게 사랑해주는 사람들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 사무실 안 열어 놓은 창 틈 사이로 차 오가는 소리와 형광의 빛들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 집니다. 아마도 마음 속에 달고 따뜻한 마음이 나를 간질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을의 시작을 여는 좋은 날 브람스 곡을 하나 들어볼까 합니다

세상에 너와 나가 존재하는 이상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길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런 상생의 개념에 잘 어울리는 곡 하나가 브라암스 곡입니다.

'Concerto for violin,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02' by Brahms  

사람은 쓸쓸한 존재이고 그 쓸쓸함을 보듬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심장을

울리고 공감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조용히 지하수처럼 맥을 이어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함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 존재들이 만나 함께 걸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원천이고 화합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사랑은 점유를 탐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닌가 싶고요. 

그런 의미의 합당한 곡이 브람스 곡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double concerto를 얘기하면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들지만

브람스도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멋진 곡을 썼답니다.

2악장에서 절묘하게 흐느끼는 두 악기의 조화는 브람스 음악의 진수라고도 얘기합니다. 


자, 볼륨을 좀 높이고 귀 기울여 보시죠.

Oistrakh와 Rostropovich가 연주하는 곡입니다. 

사실 이 곡은 브람스가 자신의 다섯 번째 교향곡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브람스가 이 곡의 형태를 협주곡으로 바꾼 것은 그의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하임' 하면 우리가 브람스를 이야기할 때 소금처럼 끼는 사람이죠.

당시 브람스는 요하임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브람스는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이 곡을 협주곡 스타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이 곡을 가리켜 '화해의 협주곡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브람스의 이 이중 협주곡은 낭만주의 음악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곡으로 모든 악기 중에서

가장 선율적이며 가장 변화가 풍부한 바이올린과 첼로가 독주 악기로 쓰이고 있으며

이들의 조화와 호흡이 아주 아름다운 곡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의미를 깊이 나누는 비 오는 8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벌써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다가오고 있네요.

돌아보면 왠지 슬픔이 앞을 가리고 없음의 존재가 왜이리 큰 것인지 새삼 힘들게 느끼지만

내게 주셨던 어머님의 사랑이 세상을 살면서 힘이 되고 용기가 된 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천국에서 잘 계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추석 전에 어머님 계신 곳에 찾아뵐께요. 편히 계시길 바랍니다.

 

 

 

Oistrakh, Rostropovich - Brahms - Double Concerto in A minor, O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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